11/07/2009

구원받는 것과 멸망받는 것, 어느 것이 쉬울까? 1 [강병국목사]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두나미스”(dunamis)를 번역한 것으로서, 그 원어의 의미는 “능력”입니다. 성경에서 “능력”이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되는데,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1:16).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폭발적 능력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과연 그렇습니까?

불행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무기력하고 나약합니다. 놀라운 능력 대신에 실망과 패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가요? 왜 그들의 생애 속에 그토록 능력(dynamite, 다이너마이트)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바를 진실로 믿지 않거나, 거짓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짜 복음 만이 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가장 큰 영적 문제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슬프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자신들이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복음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되며, 자신들의 연약한 인간적 믿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만을 주장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를 손대지 못함
왜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잃어 버린 채 자신들의 연약한 인간적 믿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만 주장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까닭은 그들이 사단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겁쟁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권에 대하여 그들을 성공적으로 기만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악한 자의 가면을 벗겨서, 그가 주장하는 거짓을 폭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이 믿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그의 거짓 주장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으며, 성도들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과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는 사단이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며 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의 능력보다 훨씬 크다는 영광스러운 진리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항상 확신에 차 있도록 하십시다.

물론, 사단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죄인들의 생활 속에 역사하여 그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믿기 어려운 놀라운 영향력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 속에서 사단을 다시 쫓아내시고 영혼을 다스리실 때에는 선의 능력이 악의 능력을 지배하게 됩니다. 사단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진리라면, 죄의 세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은 이 우주 안의 어떤 존재와도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벌어졌던 대쟁투에서 승리하셨으며, 사단은 패배한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린 멸망 당하는 것보다 구원받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힘든 것은 범죄자의 길이지 순종하는 자의 길이 아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따르는 여러가지 제약이 가져오는 무거운 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할 것이라는 암시를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길이 쉽고 가벼울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핍박하던 사울을 만나셨을 때, 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범죄자의 길은 힘들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마음의 평화와 안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자신의 능력을 거짓으로 과장함으로써, 우리를 세뇌하려고 하는 기만을 막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 하에서는 옳은 일을 하기보다 그릇된 일을 하기가 더 쉽지만, 은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속한 특권을 주장하지 못합니까? 성경의 저자들은 제한된 사단의 권위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로마서 5:20-21).

“죄가 ... 왕노릇한 것같이”라는 표현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어떻게 죄가 왕노릇을 합니까? 죄가 다스리는 권세가 왕같다는 말이지요. 모든 신령한 충동을 거스리는 육체적 본성은 은혜로 마음을 채우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죄보다“더욱 넘쳤”다는 것과“죄가 왕노릇한것같이 은혜도 왕노릇”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십시오. 분명히 은혜도 죄의 모든 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능력(power) 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보증이 아닙니까? 마귀는, 그리스도께 굴복된 생활 속에 역사하는 복음의 폭발적인 힘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받을 것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소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2:4).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십니까? 물론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십니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끕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대로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실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디도서 2:11 영문흠정역)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2 9절은, 예수께서“모든 사람을 위하여”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린도후서5:18 영문) 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단 한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로마서 5:18 영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예비책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칭의(의롭다고 하심)가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칭의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 편에 있어서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칭의가 그 사람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로마서 3:24-26).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칭의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오직 “예수 믿는”자들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유의하십시오. 전기 회사가 충분한 전력과 빛을 저의 집에 제공해 주었지만, 제가 집안에 있는 스위치들을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모든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저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절, 특히“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이라는 말은 칭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표현 입니다. 이 “죄를 간과하심”이나 죄에 대한 용서는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칭의(, 죄를 용서하심, 의롭다 하심)의 경험이 자신들의 생활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들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칭의(의롭다고 여기심)를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입니다. 율법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능력도 제공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율법의 저주 하에서 정죄받은 상태로 힘없고 무기력하게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저주와 정죄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칭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칭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와 용서가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바울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서 8 1-4절에서, 그는 칭의가 한 개인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는지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여서 율법을 순종할 수 없는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성경절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다카이마”(dakaima)인데, 이 말은 “정당한 요구”를 뜻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연약한 육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도록 하심으로써, 충분한 해결책을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칭의를 입혀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과 희생과 죽음이 육체 가운데에 있는 나의 연약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분의 계획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들어와 계실 때, 정죄함은 제거되고 죄가 용서되며,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우리 생활 속에서 만드는 변화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버림으로써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경건치 못한 것을 없애심으로써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칭의) 하십니다. 그분은 반역을 제거하심으로써 반역한 죄인을 의롭다(칭의)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는, 그분의 말씀이 친히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실제가 아닌 무엇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을 정복하신 그분께서, 이제는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도록 승리를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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