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2010

하나님의 사랑 10 -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않음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7,18).  

예수님이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죄가 없어지는 곳이 어디입니까? 마음에서 입니까, 하나님 마음에서 입니까? 죄는 죄를 용서해 주는 분의 마음에서 없어집니까, 용서받는 사람의 마음에서 없어집니까? 죄가 없어지는 장소는 용서해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령 어떤 애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화가 나서 뺨을 세게 때렸다고 합시다. 때리고 나서는 ‘그렇게 때릴 것까지는 없었는데’ 하고는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맞을 만큼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홧김에 때렸으니까, 제 행동이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저의 죄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잊어버렸는데, 그 아이는 저를 볼 때마다 “잘못도 없는데 저 아저씨가 나를 때렸지. 다음에 두고 보자. 당신은 늙고 나는 힘세어지면 그 때 두고 보자”고 마음에 응어리를 안고 삽니다. 그런 경우 그 죄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때린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맞은 그 사람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용서가 되지 않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용서되면 죄가 없어지듯이, 우리 죄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不法)을”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사하셨은즉”,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다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료(完了)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와 불법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로도 없어지지 않고 오직 피 흘려 죽어야 하는데, 그 대가를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이미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를 없이 하기 위해 드려야 할 어떤 제사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도 “성경은 그렇게 돼 있네요. 성경은 그렇게 돼 있지만, 어디 죄가 없어졌는지 안 없어졌는지 보자”하면서 자기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이, 새까맣게 그대로 있는데, 뭘”. 자기 마음 속 들여다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잠언 26:26)라고 했습니다. 왜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까?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마음에서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어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언젠가는 그 죄를 문제 삼아 나를 잡아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사람을 찾아가 “선생님, 몇 년 전에 선생님한테 이런 저런 죄를 지은 것이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너무 너무 괴로워 용서를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거 예전에 다 용서하고 기억도 안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거 참말입니까?” “아∼ 참말이고말고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죄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미 용서했고 그 사람 마음에 기억도 안한다고 했으면 다 해결된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사람한테 죄 지은 것을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당신 죄 지은 것 있잖아. 그 사람에게 일러 준다. 나쁜 짓 한 것 다 일러준다. 안 일러줄 테니까 돈 좀 내놔” 한다면 겁납니까, 안 납니까? 그 사람이 이미 다 용서했다고 했는데 겁날 것이 뭐 있습니까. “일러줘라! 일러줘!”하며 당당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게 일러주면 그 사람이 “예끼 나쁜 사람. 내가 다 용서했고 다 해결된 문제인데 왜 고자질하는 거야. 나쁜 사람 같으니라구. 저리 가!”하고 쫓아 버릴 겁니다.

마귀는 우리로 죄를 짓게 해 놓고는 ‘너, 하나님한테 일러준다’, ‘너 같은 것은 안받아준다’, 그리고 ‘너 같은 것은 천국에 못 간다’고 자꾸 송사합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마귀야! 하나님이 내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최고 재판장이 내 죄를 없다고 하셨다.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죄를 다 갚아 주셨기 때문에 없다고 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당당할 수 있습니다.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는데도 내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까? 당연히 사해지고 말고요. 내 죄가 아무리 커도 예수님의 공로는 더 큽니다. 내 죄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큽니다. 예수님의 피는 내 죄를 영원히 사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이사야서 40:2)고 말씀하셨습니다. 10억원 빚졌으면 20억원 갚았고, 100억원 빚졌으면 200억원 갚았습니다. 아주 넉넉하게 갚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 ‘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말씀을 듣고서 한다는 소리가그래도 믿을 화끈한 것이 있다고 하던데. 오는 없나요?”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믿고 화끈하면 구원받은 것이다”고 말씀했습니까? 사실을 믿는 데 화끈한 체험이 왜 필요합니까?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그래, 그래. 용서했다. 걱정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용서했다고 하시지만, 화끈한 뭣이 없네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럼 화끈하게 해 주지. 용서했다” 하면서 따귀를 ‘딱!’ 때려 화끈하게 해주어야겠지요. 그랬다면 둘 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용서했다고 했으면 된 것이지 또 무슨 화끈한 것이 필요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별 이상한 것에 의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귀에는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감정을 버리고 말씀에 서니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잡던 것 주가 붙드네”(찬송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서면 불완전한 구원이 완전해집니다. “예수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단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나는 믿습니다”(찬송가). 어디에 굳게 서서 믿습니까? 말씀에 굳게 서 믿습니다. 성경 말씀만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했다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으면 사한 것입니다. 누가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어도 내 죄는 사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그의 죄는 사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으므로 네 죄는 사했다고 선포했다면,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죄 사함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억치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했으면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영원히 사했다고 했으면 영원히 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도 안심이 안 됩니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를 도랑물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어떻게 사하냐?”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거짓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죄가 큰 줄은 알면서 예수님의 공로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줄은 모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사하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을 배척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7).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 즉 얼마든지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따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피로 죄 사함을 장차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가령 밤중에 “지금 밤입니까, 낮입니까?”라거나 “지금 밤인 것을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예, 밤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정말로 밤입니까? 밤인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밤이라고 왜 그렇게 철석 같이 믿습니까?”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당신은 “밤이니까 밤이라고 믿지요”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환한데 낮이라고 좀 믿으면 안 되나요?”라고 물을지라도, 역시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밤이기 때문에 밤인 것입니다. 밤이라는 분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이미 완성된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밤을 낮이라고 우겨댄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밤이 낮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우겨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해 주신 것을 확실히 믿는 이유는 죄 사해 주신 것이 사실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사실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며,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해졌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 죄가 사해진 것도 아닙니다. 사해 주신 것이 사실이니까, 우리는 그 사실대로 믿는 것입니다. “다 사해 주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가 그럴만한 이유도 없이 성경책만 한 금덩어리를 “이것 그냥 가지세요!” 하고 내게 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농담 마십시오” 하겠지요. 사람들에게 구원(救援)이라는 것도 비슷한가 봅니다. 며칠 동안 성경강연회를 들으면서나, 독자의 경우처럼 전도용 책자를 보시면서 “구원받아야 된다”고 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가, 복음(福音)을 접하고 보니 구원받는다는 것이 너무 간단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받아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고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간단하냐?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줄 알았는데, 너무 허망하다”며, 너무 쉬워서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나 쉬운 일이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주 만물의 창조는 “말씀으로” 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하나님도 말씀만으로 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일만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여야만 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계획하시고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것이 쉬운 일인지 아십니까? 구원의 선물을 받는 사람은 그냥 받으면 되지만, 준비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과 고통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용자가 전기 켜는 것이야 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전기를 편리하게 사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돈이 바쳐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를 발명하면서 들인 노력, 발전소 세워 전기를 얻고 또 그것을 가정까지 끌어오기 위해들인 엄청난 노력과 비용 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와 같이, 믿는 것은 간단합니다. 믿는 것이니까 쉽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있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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