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2011

고난 속에 흘린 순교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합니다.


사도행전 7 : 54 ~ 8 : 3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무리들은 크게 찔림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회개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는 쪽으로 반응합니다. 말씀 앞에서 스데반과 이스라엘의 모습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는 스데반의 설교는 같은 동포로서 무한한 애정과 겸손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뻐기거나 정죄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지 이스라엘이 불신앙의 죄악을 깨닫고,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돕고자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랑과 진심이 담긴 스데반의 설교는 백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달았지만 오히려 분노합니다. 그들의 분노는 스데반을 돌로 치려 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너무나 아프게 자신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찔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그들에 의해 순교하고 맙니다. 스데반은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더욱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훗날 극적인 회심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고난이 있지만, 복음때문에 받는 고난은 신앙과 교회성장의 핵심 열쇠입니다.

안티 기독교의 시대를 살고있지만 불신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사각오의 자세로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핍박받고 순교하면 영광이요, 영접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이라야만 진정한 하늘 위로를 받습니다. 
말씀은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고자 하는 층의 층수를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목적하는 층에 도달하게 됩니다. 층수를 누르지 않고 있으면 아무리 엘리베이터 안에 오래 있어도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려면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무리들은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았지만 오히려 설교자를 향해 이를 갈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스데반을 죽이고, 나아가 살기가 등등하여 온 교회를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어둡고 음습한 곳에 갑자기 빛이 비췰 때, 그 곳에서 살던 벌레들이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복음을 향해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둠 속에 살지 말고, 회개와 순종으로 말씀의 빛 앞에 나아갑시다.

찔리고 아프더라도 말씀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고 모든 죄를 깨끗이 사해 주시며, 하늘의 위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지금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와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출처:매일선교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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