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2011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9 : 1~ 9
* 다메섹(2절) :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 떨어져 있음. 바울은 핍박을 피하여 온 자들을 뿌리를 뽑을 작정으로 이곳까지 감.

다소 사람 바울의 회심은 교회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그의 회심을 계기로 교회사는 ‘이방인 선교’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회심 장면은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열성적 찬성자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적극적 핍박자였던 바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이유도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 교회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어떻게든 복음 확산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사울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위험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거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빛과 부르심을 통해 바울이 예수님과 스데반의 거룩한 순교의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비록 교회의 핍박자요, 성도들의 원수일지라도 주님은 바울 역시 복음이 필요한 한 영혼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되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먼저 우리를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구속해주시는 무조건적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인격적인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인 은혜이지만 강제적인 은혜는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의 회심 사건은 강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바울의 회심 사건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거부할 수 없는 빛과 소리로 임하셔서 그를 엎드러지게 하셨지만 사울의 인격 자체를 침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사울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도록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질문하심으로 그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울 역시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대답하며 인격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속박하는 것은 죄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존중하시고, 인격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드라마틱한 간증거리가 있어야만 은혜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조용한 음성으로 직접 우리의 내면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바로 그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인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의 온 마음과 뜻, 정성을 다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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