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2009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놀라운 계시(데이빗 윌커슨 목사) - 1

출애굽기 33장은 모순적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시니라” 그리고는, 단지 몇 절 뒤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33:20) 이는 문자적으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한 절은 모세가 주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절은 분명히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모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이 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놀라운 친밀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모세 사이의 결속 때문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었던 통찰력과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 알기를 구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주님께서 모세를 친구로 인식하셨다고 말합니다(33:11). 이것은 우리에게 모세가 하나님을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것처럼 보았다고 (또는 알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충실한 시간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친밀한 지식과 이해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막 주님을 대적하여 불경스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보물을 녹여서 우상, 즉 금 송아지로 빚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의 주위를 악마적인 광란 속에서 춤추고 돌며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그 이상이 관련된 것입니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장막에 작은 우상을 숨기고 그것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 곧 너희가 경배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들을 들고 다녔은즉”(사도행전7:4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분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출애굽기32:10)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는 나머지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시간 주님과 함께 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여전히 그 백성들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그는 이렇게 언명하며 백성들의 죄를 자신과 동일 시 했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들을 만들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2:31)

모세는 주님께서 모든 진을 소멸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였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분의 정해진 사역자들이었고, 주님은 그들과 언약 안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했던 것입니다. “네, 주님, 이들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만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당신 얼굴의 큰 빛 앞에서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만일 그들을 자르신다면,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사람이나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차라리 스스로 무덤을 파고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이 딜레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우선 이스라엘의 죄 된 본성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확실히 퇴보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날에 모세는 이렇게 그들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네가 이집트 땅을 떠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주를 거역하였으되”(신명기9:7)

그러나 모세는 또한 그 자신의 죄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금송아지에게 절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받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딜레마에 빠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현장에서 저희를 심판하실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이었어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대한 어떤 점은 제 스스로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이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모든 움직임, 나의 일어섬과 앉음을 아십니다. 저는 당신과의 친밀함을 나누었고, 당신 앞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이전 어떤 때와도 달리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무엇인가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것이고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호의를 얻었다면, 제발, 당신의 백성을 죄 가운데서 발견되었을 때, 그들을 향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십시오. 이 위기에 제가 지금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설지 보여주십시오. 제가 여전히 당신의 친구입니까? 여전히 당신의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신의 백성은, 여전히 당신의 선하신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모든 위기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을 봐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상황에서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지도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는 높은 하늘에까지 죄를 지은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죄도 그를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였습니다. 성경은 모든 자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주를 알게 하시고”(출애굽기33:13).

여기 히브리 원문은 이렇습니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시오” 여기서 자신이라는 단어는 “마음”으로 번역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신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계시기 필요합니다. 저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당신은 여기서 뭔가 당신 자신에 관해 저에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런 류의 위기에서 당신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떻게 당신의 은혜를 구해야 할지, 심지어 그것을 어떻게 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불결한 죄에 사로잡힐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도 모세의 입장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분께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거나 작게 느껴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그분의 심판을 살 만큼 큰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큰 친밀감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감을 부정하고 그분의 우정을 화나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큰 계시로 축복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빛을 대적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큰 사랑을 보았지만 그 면전에서 범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급박한 울부짖음이 솟아오릅니다.

“주님, 이런 위기에 당신은 어떠한지 보여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이러한 면을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죄 때문에 놀랐다면- 내가 내 마음에 금송아지를 세웠다면- 저에게 어떻게 반응하실 건가요? 우리의 위기에, 우리의 의식은 죄의식에 짓눌립니다. 깊게 침체되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고는 모세가 들었던 그 진노의 음성입니다. 나를 혼자 두어라. 나는 너를 소멸하고 내칠 것이다. 몇 번이고, 나는 너를 내 팔로 끌어안았다. 모든 소망 없는 상황을 통해 나는 너를 안고 건넜다. 나는 너에게 친절하고 사랑 많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너는 자진하여 심각하게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너를 포기한다. 나는 나의 길로 걸을 충실한 종을 찾을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바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반역하는 양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세가 마주친 것과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의 친구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회중의 죄와 마주치실 때 어떠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한 친구로써 아는 것으로만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이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에서, 친구는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친구이신 것으로 아는데.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나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알아. 그분께서는 어떠한 친구라도 그러는 것처럼 공급해 주시지.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에 그분께서는 자비로 응하시지.”

그러나 이제 모세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삶에서 금송아지를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내가 주님과의 친밀함의 신뢰를 배반할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분께서는 거룩하시고, 순결하신데, 나는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를 깨었습니다. 지금 나의 상처 받은 친구의 눈 앞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네, 나는 그분과 함께 직면하여 이야기해왔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친밀감을 나누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패를 한층 더 나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심각하게 범죄 하였고, 그분의 영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주님, 당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십시오, 우리 사이가 좋았을 때만이 아닌, 제가 반역하여 죄 지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제가 이 계시를 받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의 성품을 알기 전에는 그분과 함께 어디에 서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이해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범죄 하였을 때 그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다루실지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파라오의 강퍅함에 무시무시한 심판으로 응하시는 것을 거룩한 두려움 안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군대가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주님께서 어떻게 믿음과 순종에 반응하시는지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초자연적으로 홍해를 가르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알았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하나님을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알았습니다. 주님은 불붙는 떨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모세, 네 신을 벗어라, 너는 거룩한 땅에 있노라.”

그러나 지금, 현재의 위기에서, 모세는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우의 하나님의 성품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것은 더 이상 친밀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그가 얼마나 신실했는가, 또는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봉사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거는 여기서 상관없었습니다. 이제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죄가 용솟음 칠 때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무엇인가를 더 알아야만 했습니다. 뭔가 희망을 줄 것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진리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그분의 임재로,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과 성품에 대한 더욱 큰 계시로 그를 이끌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는 우정이나 친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의 상한 백성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계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분의 영광을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출애굽기33:19)

그리고는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 임이니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에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33:20-22)

이 절에서 ‘영광’의 히브리 단어는 ‘내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네 가까이에 지나갈 것이다.” Helen Spurrell의 히브리 원어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너를 바위의 움푹한 곳에 숨기겠노라. 그리고 나는 내가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능력의 보호로 지켜 주겠노라.”

주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안전할 장소에 너를 두겠노라. 그 장소는 바위 안이다. 그리고 나는 네가 거기에 머물기를 바란다. 의심을 품거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계시를 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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