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8/2009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데이빗 윌커슨 목사) - 2

저는 이렇게 느꼈던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적인 퇴보를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은 절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앉아 TV로 설교를 보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들은 영적 식사로 어떠한 고기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먹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냉담함이 들어섭니다. 곧 그들은 교회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들은 지체들의 모임을 무시하는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경고합니다.(히브리서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임재에 완전히 무관심하게 됩니다.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개인적 교제를 계속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어떠한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귀중한 시간을 성실히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사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로부터 깊이 마셔야 합니다.

계시록1-3장을 비추어볼 때, 모든 신자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선행- 나의 성경공부와 내 섬김-이 예수님과의 시간을 빼앗았는가? 나는 여전히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잃어버렸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어두움을 염려하시며 모든 시대의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계시록2-3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교회들은 글자 그대로 아시아의 일곱 회중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교회가 교회역사의 7지역을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단순히 여기 이 메시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교회에 퍼지는 어떠한 영적 어두움에 관해서도 우려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이 절의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 거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 개의 교회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우리는 이미 에베소의 문제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 부족이었음을 봤습니다. 두아디라의 문제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꿰임의 악마적인 사역자들과의 관련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이 말씀을 읽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나는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계시록2:18)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거룩한 분노의 타오르는 눈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 너의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들은 너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그분께서는 그분과의 친밀함을 잃었다고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꿰뚫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자칭 여선지자 이사벨이란 여자를 용납함으로 그녀가 내 종들을 가르치고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기 때문이라.”(2:20)

여기서 언급된 이세벨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짓 목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두아디라의 목사에게 그분의 백성을 꿰는 탐욕스러운 사역자들을 허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육욕으로 가득 찬 사역자들이 너희 강단에서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빛의 천사와 같이 와서는 내 백성을 꿰기 위하여 사악한 속임수들을 쓴다.”

여기의 이세벨의 언급은 단지 탐욕스러운 사역자 그 이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거짓목자들은 실제로 그들의 육욕을 실행하고 이루기 위한 음모를 짜냅니다. 단순히 말해,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눈에 악하고 가증한 모든 자들의 전형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입니까?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하나님의 남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고, 신실하며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신자들이 거짓선지자들에게 현혹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사악한 사역자들에게 꿰임 당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충격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나라의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무리를 속여 강탈하려는 여우들이 한때 거룩한 메시지로 알려졌던 교회들 안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왜 이를 허용했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설교자들은 회중을 끌어요.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요.” 그러나 그는 사탄 그 자신의 먹이를 대접하기 위하여 거짓선지자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복음 말입니다.

여기의 모순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라디아의 목사를 사랑과 경건함의 사람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람이 언어도단의 죄, 곧 사람들의 육신을 선동하고 그들의 육욕거리를 제공하는 목자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흥에 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 사악한 발상을 들여왔고 사람들을 악마적 유혹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그들의 복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우들의 유혹을 관용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이 너희 백성들에게 하는 짓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이 설교자들의 집회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파탄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들은 간음하며 우상의 제물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거절하였다. 나는 내 양들에 대해 목자로 너를 불렀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 왜 너는 이와 같은 악을 관용하는 것이냐? 왜 너는 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느냐?”

목사들의 첫째 의무 중 하나는 강단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자가 거기 서서 거짓된 말을 전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억제적인 문제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적인 간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속박, 육욕적인 교제, 즉 거짓 사역자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고는 확실합니다. “너희는 육신을 자극하는 것을 먹고 있다. 그것은 육욕을 만족시키는 복음이다. 그리고 너희의 영적 생명은 위기에 처해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자들은 배교하는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가진 무엇이라도 여러분에게 내줄법한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복음에 유혹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속삭이는 교활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너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해”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멸망시키고 속이러 오는 거짓목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 거짓 복음을 받는 다수의 분별력 없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영이 사실은 악마적인 어떤 TV복음을 먹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욕에 호소하며 노인의 마지막 동전마저 취하는 그런 부유한 설교자들로부터의 메시지를 들이키고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을 보는 게 무슨 해악이람? 그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나를 해할 리가 없어. 게다가,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걸?” 아니오! 만일 여러분이 사악한 목자와 함께 한다면 여러분은 악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모든 TV복음 설교자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육에 이끌리는 설교자들의 동기를 간파하는 잘 다져진 성도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계시록2:24) 그리스도께서는 이 돈을 붙잡는 사역자들에 관해 둘러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옥의 바로 깊은 곳까지 영혼을 끌어 내린다.” 그렇습니다. 이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교리로 얼룩진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녀에게 자기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거짓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들을 인내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 경고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돌아설 충분한 시간을 받아 왔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 모든 바른 사역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며,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대환란에 던지리라. 또 내가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리라. 그러면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 ”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단지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듣고 지지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약한 병든 상태와 영적 죽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러한 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네 음행을 쏟았으니”. 다른 말로 “너희는 온갖 이런 거짓 사역자들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너희를 팔아먹으며 너희에게 상처와 영적 죽음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사역자들에게 대항하여 신실하게 섰던 자들을 칭찬하십니다. “”(2:25)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진리의 분별을 배웠구나, 너희는 온갖 교리의 바람과 물결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붙들 고 있는 것을 지키라. 속지 않게 하여라. 그것이 내가 부탁하는 전부이다. 나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너희에게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겠다” (2:24를 보십시오)

저는 예수님으로부터의 편지를 여는 라오게디아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게디아의 교회에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이 목사는 다음을 읽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이 얼마나 주님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전 교회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모두가 영적으로 눈멀어서 그들 모두가 미지근하게 되었을까? 이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거룩한 남은 자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3:17) 것으로 묘사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비참하고 가련하며 헐벗었으면서도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 사람들이 지독한 거짓에 의해 눈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매우 물질적이었고 부유하며 번영하였습니다. (이는 금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나 영향력적으로 증대하였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만으로도 전적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분별력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교회는 번창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교회를 좋아하고 거기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살피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보신 것으로 인해 질겁하셨습니다. 이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 속았습니다. 그 거짓은 “나는 괜찮아, 나는 내가 영적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야,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동일하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의롭고, 뜨거운 신자야.”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이렇게 단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3:17)

저에게 이 회중은 현대 미국교회의 자본주의적 열광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지 계속 증가하는 성장을 뜻하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성장 아니면 죽음” 항상 모든 것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모든 것이 가장 커지고 최고가 되도록 하기 위한 동인을 가져야 합니다.

그거야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침투되었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목표는 영적 성장이 아니라 재정과 자산 그리고 수적인 확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이러한 열광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의 라오게디아인들에 대한 심판은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너는 네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지. 너희의 눈먼 것이 너희를 미지근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지. 너희는 여전히 너희가 나에게 뜨겁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에서 교회의 죄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분별의 상실이었고,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이제 라오게디아에서 우리는 그 모든 죄보다 심각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그것은 모두 벌거벗음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에 관해 라오게디아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3:18) 여기서 벌거벗은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자원이 고갈된’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 곧 그들의 필요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그의 자원을 준비해두십니다. 그분의 자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진정한 영적 부요 입니다. 그분의 힘, 그분의 기적적인 사역의 권능, 그분의 초월적 인도하심, 그분의 명백한 임재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나의 모든 자원을 치웠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너희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

한 시간짜리 찬양예배 내내 편안하게 앉아있는 회중을 그려보십시오. 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인생의 스트레스를 다루는지에 관한 짧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지거나 뉘우쳐야 할 어떠한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꿰뚫는 말씀으로 죄를 깨닫거나 괴로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 나를 녹여주소서, 나를 깨뜨려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나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울부짖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에 가졌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 신자들은 한때 하나님의 말씀에 열중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영적인 탐조등 아래 내려놓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모든 것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일요일 아침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미지근한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라오게디아의 목사와 그의 회중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이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자원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그분의 사랑의 손이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 안에 그분의 권능과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라오게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식사를 드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응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와서 교제하자고 너희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너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와 함께 보내는 그 어떠한 시간이라도 너희에게 그 자원들을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이 너희가 나의 자원을 얻는 방법이다. 나와 함께하는 너희의 교제는 너희가 사역을 계속 하는데 필요한 것을 준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마지막 날에 교회의 간증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아멘!   <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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