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2010

신분의 대혁명


이제 우리의 비전을 혁신해야만 할 시점에 왔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당신의 비전은 너무도 작습니다라고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가장 좋은 해결책은 우리가 기대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10명의 새 신자를 기대하고 있다면 자, 이제 그 수를 100명으로 늘리자.

이러한 반응은 이 말의 참뜻을 놓치게 만든다. 수를 늘리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더 큰 비전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비전은 우리가 누군가, 그리고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신분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분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신분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신학자들이 범하는 실수는 예언서에 담겨진 모든 좋은 것들을 천년 왕국이라고 하는 비밀한 카펫 밑에 모조리 쓸어 넣은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지금 당장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용기와 믿음과 행동을 요구하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시기로 연기시키는 경향성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이것이다. 좋은 것은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학의 기초에는 앞으로 교회의 상황은 계속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따라서 교회의 비극은 말세가 되었다고 하는 또 하나의 지표라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으로 교회가 약해지는 것이 곧 교회가 올바른 길에 서 있다는 확신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

세상과 교회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에 내포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지만 지금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여기에는 아무런 믿음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관점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마귀적이라고 하는 불신앙 속에 우리는 갇혀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란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다.  이는 왜 우리가 소수일 수밖에 없음을 변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며 어쩌면 가까스로 변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런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믿음 체계를 붙잡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에 위배된다. 에베소서320절 말씀처럼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예수살렘이)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졌도다)”(1:9).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결과는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귀히 여기시는 존재라는 생각보다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해 더욱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우리들의 무능력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 떠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르시고 자주 넘어지는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셨던 동일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이 땅위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의 몸이라고 불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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