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실 때, 그분은 그 예언을 통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으시는 것보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가보란 선지자가 나오는데 그가 유다로부터 내려와서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 이렇게 말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0-13)
예루살렘에 가면 잡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예언은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궁극적으로는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다는 생각은 아마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개념이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저의를 깨닫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맹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예언에 대하여 하나님과 상호작용을 하기를 더 원하신다. 하지만 이 사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이단사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친구와 만날 때마다 내 방식대로만 고집한다면 그 친구와는 어떤 관계를 갖게 되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만 가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을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나눈다면 과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 태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아마 오래지 않아 혼자가 되고 말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그 유명한 사랑 장에 보면 사랑의 속성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고전13:5).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속성이 인간에게 적용되기 이전에, 그것이 먼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그분의 유익만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지내고 교제하지 않으신다. 그분이야말로 몸소 본을 보이는 분이시다!
구약의 또 다른 인물 중 다윗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그의 통치는 그의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내려갔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우정을 세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예법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것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었다.
다윗은 성막을 지었으며 법궤 앞에서 제사장들이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다. 그것을 거의 30년이나 지속했다. 다윗은 비록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기록에 보면 하나님이 그를 너무 기뻐하여 마지막 때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신다고 했다(행15:16-18보라).
하나님과 다윗의 우정은 너무나 특별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위하여 성전을 봉헌하고 싶어 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아무튼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지어 봉헌하도록 하셨다.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언하였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로부터 내 이름을 둘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왕상8:16-17)
이것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었다. 다윗을 택한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다윗의 마음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를 좇아 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은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다윗의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우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정은 순종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마음 안의 특별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어떤 사람에 대한 용서를 그대로 둔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한 번 생각해보라. 하지만 주님은 그런 중대한 결정도 우리를 믿고 맡기신 것이다.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웠던 사도 요한이란 인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중요한 안목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한다면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을 나타내주는 말씀은 성경에 가득하다. 우리는 그동안 성경을 종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데 너무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생각할 두뇌를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음을 명심하라.
<왕의 자녀의 초자연적인 삶/크리스 밸러턴/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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