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2010

교회 안, 탐욕의 회전하는 그림자

멋진 한판승부로 엘리야가 바알과 아스다롯 사제들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을 ,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들 거짓 신이 자신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문화 속에도 스며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엘리야 스스로가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7,000명을 남겨두었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다(왕상19:18참조).

물론 바알에게 무릎 끓는다”(본문에서는 바알에게 입맞추다”)라는 구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는 예수님의 제자 면이 행했던 배신을, 그에 맞물린 당황스런 입맞춤을 상기시켜준다. 풍요의 신을 풍년, 재물, 명예를 약속해 준다. 탐욕의 그림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안에 가룟 유다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드리워져 있다.

키스 데이비스는 종말 달리고 있는 시대 , ‘유다의 입맞춤으로 존재하는 탐욕의 그림자에 대해 말하기를, “점점 많은 크리스천이 슬그머니 교회 안으로 자리한 탐욕의 어두움을 향해 빛을 비출것이다. ‘유다의 입맞춤과의 한판승부는 불가피하다.”

이사야 14 14절을 보라. 사단은 내가 것이다’(I will)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내가 것이다 가장 위험한 생각(정신)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신) 성실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중심엔 어두움이 자리한다. 그러한 영을 소유한 사람의 전형이 바로 유다이다. 그는 제자(사도) 사람으로서 귀신을 쫓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기도 했다. 결국, 제자 어떤 누구도 가룟 유다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까지 분별하지 못했다.

유다는 멸망의 아들이었다-가장 위험한 영의 소유자였다, 어두움이 능력의 근원이었다. 유다는 돈이 가방을 관리했다. 주머니에 몰래 손을 넣곤 했다. 많은 돈을 얻는 일이라면 친구라도 팔아넘길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교회가 부요함을 누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역의 원동력을 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성취해내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단은 수만 있다면,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도 속임에 넘어뜨리려 것이다.” 시대에 사단은 교회에서 활동한다.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심령술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 성령님을 인정하는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한다. 유다 역시 성도들 하나였다. 은사와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상태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 역시 가룟 유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그리스도(그리스도에 반하는) 영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가운데 들어왔으니 저희는 없는 구름이요”(1:12)

적그리스도의 영에 넘겨진 사람들의 외양(外樣)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과 흡사하다.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에 둘을 분간하는 데에는 진정한 영적 분별력이 소요된다. 이들과 맞서 싸우거나 이들의 정체를 분별해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예언사역자들의 숫자가 충분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성경말씀을 왜곡한 , “우리에게 헌금하면 당신은 부유해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부요함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이 때문에 예언하는가?

기근의 , 엘리야는 광야에 머물렀다. 같은 음식을 반복해서 먹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기적의 하나님께 자신의 생존을 맡겨야 했던 것이다. 이후 하나님의 은혜는 천한 과부-수백 명도 아닌, 명의 과부를 통해서 확장된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엘리야는 믿음과 성경의 본이 되었다. 그가 견지한 믿음과 성결의 정도는, 지금도 기근으로 신음하는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참된 선지자와 사역자들의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물론 부유한 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요구된다. 장차 다가올 때에, 이들 역시 엘리야와 동일한 수준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지녀야만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온전한 순복과 극단적 의존의 화염 속으로 들어가도록 부름 받았을는지도 모른다.

온전한 순복의 화염(열정) 끌어안다. – 엘리야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 모두가 제단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꽃이 황소만을 사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도 불살랐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제단의 나무만 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운데 육욕으로 쌓아올린 모든 것을 태웠다는 사실을 것이다. 제단의 돌뿐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조직, 종족, 교회 연합을 제단의 흙뿐 아니라 마음속 의심과 불신의 말라비틀어진 씨앗까지 불태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속에 감춰진 비가 오면 싹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생명체까지 모두 불살라 버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 과거 성령 운동의 남은 잔재까지 모두 핥아버렸다. 남아있는 방울까지 화염으로 인해 증발해버렸다. 과거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을 온전히 불살라 ()’ 지경으로까지 변화시킨 것이 바로 불꽃이다. 너무 강렬한 열기이기에 마저 남은이 없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다. 놀라운 광채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발하여 땅의 그림자를 모두 몰아내었다.

간략히 말하자면 희생제는 정화작업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깨끗케 하신 것이다. 거룩한 불꽃은 정결케 아니라 사람을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빛을 머금은 얼굴, 하나님만을 주목하는 심장,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케 운명.

기도의 응답으로 불을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가 신이시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온전한 순복의 화염을 끌어안으라는 엘리야의 권유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우리 바알의 영향력과 성령의 영향력이 펄치는 한판승부는 언젠가는 종결될 것이다. 어떻게 싸움이 끝나든, 이상 우리는 진영 사이를 오고 감으로 미적지근한 충성의 그림자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로, 돌이킬 없는 결과로 싸움은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를 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1-2)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그분을 닮으십시오.”하고 권면하고 있다. 그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소원(疎遠) 만한 그림자가 없다.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시키지 못하게 방해할 만한 그림자도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를 제거하기 전까지, 사회에 드러워진 그림자를 제거할 없다.

우리의 가운데 보다 밝고 깨끗한 빛이 발하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비추는 세상의 없다. 우리는 신비사술에 관여했던 과거, 혼적인 근원으로 계시를 받았던 과거, 그리고 세대의 바알에게 맞추려 무릎을 끓었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우리는 온전한 순복 가운데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제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죽음을 맞이하도록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받아들일 ,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유업을 물려받을 거룩한 화염이 우리 위에 임할 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말하길, 과거 성령의 움직임은 장차 하나님께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실로 우리는 이미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기적과 표적들을 목격하고 있다. 자체로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장차 우리가 목격하게 기적의 전조(조그마한 상징) 뿐이다.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에 집중해야 한다. “쓸모없는 우상에 매달리는 사람은 장차 받게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광란적인 사랑 안에서 정결함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드린 사람은, 온전한 기쁨을 가지고 다가올 성령의 시대 속으로 도약할 것이다.

<초자연적 능력의 회전하는 그림자/줄리아 로렌/ 존슨/마하쉬 차브다/순전한나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