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의 영이 죄에 대항할 때.
혀가 죄를 향해 맹렬히 비난할 뿐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질색하는 것, 그래서 아무리 교묘하게 죄가 착색되어 보인다 하여도 그 추악함을 간파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의 초상화가 아무리 잘 그려졌다 하더라도 혐오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비디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노라”(로마의 작가 마르티 알리스의 경구). 음식이 있는데 오리가 휼륭하고 양념이 좋다고 하자. 그래도 그 음식물이 사람의 비위에 안 맞는다면 그것을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귀가 죄를 쾌락과 이익으로 요리하고 꾸며놓는다 자라. 그래도 이것은 은근히 혐호감을 가지고 있는 참다운 참회자는 그것에 넌더리를 내고 참견도 하지 않을 것이다.
2. 죄에 대한 참다운 미움은 보편적이다.
죄에 대한 참다운 미움은 두 가지 면에서 보편적이다. 그것은 먼저 기능면에서 보편적이다. 다시 말하면 판단에서 뿐 아니라 의지와 정서에서도 죄를 싫어함이 있다. 허다한 사람이 죄는 비열한 것이라 확신하며, 그의 판단에서 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죄에서 달콤함을 맛보며 은근한 만족감을 가진다.
여기 판단에서는 죄를 싫어함이 있으면서 정서에서는 죄를 포용함이 있다. 그에 반하여 참다운 회개 때는 죄에 대한 미움이 모든 기능에 들어 있고 지적인 기능에 뿐 아니라 특히 의지 속에도 들어 있다. 그래서 “미워하는 것 그것을 함이라”(롬7:15)고 하였다. 바울은 죄에 자유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지는 여전히 죄에 대항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미움은 대상면에서 보편적이다. 한 가지 죄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 미움은 전 종류에 대한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하나의 뱀을 미워하는 사람은 모든 뱀들을 미워한다. 그래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119:104)라고 하였다. 위선자들은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다소의 죄들을 미워하겠지만 참 회심자는 모든 죄들, 유리한 죄들, 허울 좋은 죄들, 바로 부패를 부추기는 것들 그 자체를 미워한다. 바울은 죄의 운동력을 미워하였다(롬7:23)
3. 죄에 대한 참 미움은 모든 형태의 죄에 대한 것이다.
거룩한 마음은 죄를 그것의 본질적인 오염 때문에 혐오한다. 죄는 영혼 위에 오점을 남겨 놓는다. 중생한 사람은 저주 때문 뿐 아니라 감염 때문으로도 죄를 혐오한다. 그가 이 뱀을 미워하는 것은 그 쏘는 것 때문 뿐 아니라 그 독성 때문에도 미워한다. 그는 지옥 때문 뿐 아니라 지옥처럼 죄를 미워한다.
4. 참 미움은 인정사정이 없다.
죄와는 이 이상 도저히 화해되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화해되겠지만 미움은 그렇지 못하다. 죄란 다시는 호의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멜렉과도 같다. 하나님의 자녀와 죄 사이의 전쟁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의 전쟁과도 같다(왕상14:30).
5. 참다운 미움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반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죄도 반대한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못하였다(계2:2). 바울은 베드로가 비록 사도였지만 그의 허위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노여움으로 돈 바꾸는 자들을 채찍질해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다(요2:15). 그는 성전을 거래소로 삼는 것을 묵인하지 않으려 하셨다. 느헤미야는 고리대금업과(느5:7) 안식일 모독으로 인해서(느13:17) 귀족들을 질책하였다.
죄를 미워하는 자기 가정 안에서도 죄악을 참지 못할 것이기에,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시10:17)라고 하였다. 행정장관들이 그들의 격분 가운데서는 의지충전함을 과시할 수 있으면서 악덕을 진압하는 데는 아무 영웅적인 의기도 보여주지 못할 때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죄에 대한 반감을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다. 독이 뱀 속에 있듯 죄가 그들 속에 있어 선천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회개와 거리가 먼가! 경건한 자에게 죄는 눈 속의 가지와 같은데, 약한 자에게는 머리의 왕관과 같아서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렘11:15)라고 하였다. 죄를 사랑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선한 사람이 부지중에 죄스런 행동에 빠져들 수도 있지만, 죄를 사랑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돼지가 진창에서 뒹글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마귀가 하나님을 반역하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사랑한다는 것은 의지가 죄가운데 있음을 나타내며, 의지가 더 많이 죄 가운데 있을수록 그만큼 죄는 더 큰 것이다. 고의성은 죄를 속죄제사로도 씻을 수 없는 죄로 만든다(히10:26).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금지된 열매를 사랑하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욕지거리와 간음죄를 사랑하며, 죄를 사랑하고 책망을 미워한다. 솔로몬은 사람들의 세대에 관하여 말하기를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전9:3)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죄를 사랑하고, 자신의 죽음이 될 것을 껴안으며, 지옥 저주를 놀이로 삼으니 “미친 마음을 품고”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우리를 설득하여 죄에 대한 사무친 미움으로 우리의 회개를 나타낸다. 전갈과 악어 사이에는 철천지의 적대감이 있는데, 그런 것이 마음과 죄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개/토마스 왓슨/CLC>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