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2010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들 – 토마스 왓슨

1.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라고 하였다. 회개는 재량권이 아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선택권에 맡겨진 것이 아니며, 이것은 피할 없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최고법원에서 회개하는 죄인 외에는 아무 죄인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셨고, 그는 손수 만드신 자신의 법을 어기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인자를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34:6-7)라고 하였다. 비옥 하나님을 태양이 빛으로 충만함보다 긍휼로 더욱 충만하기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 죄악 가운데 계속 행하고 있는 죄인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라고 하였다!

2. 하나님의 순결한 성품은 회개치 않는 피조물과의 친교를 거부한다.
죄인이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과 죄인은 친구가 없으므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1;16)라고 하였다. 가서 너희 자신을 회개의 짭짤한 물에 잠그라. 그리고 나서 내가 너희와 담판할 터이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18)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렇지 않거든 네게 가까이 오지도 말지니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6:14)라고 하였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아직 불법 가운데 계속 처신하는 자를 방관하실 있는가?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23:7) 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회개하지 전의 죄인과 평화롭게 지내신다면 하나님은 죄인이 저지른 모든 짓을 좋아도 하시고 승인도 하시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그는 자신의 거룩함에 역행하게 것이다. 반역의 범행 현장에서 발각된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의 거룩성과 모순되는 것이다.

3. 계속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범위 밖에 있다.
그의 사명을 보라. “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나를 보내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61:1) 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임금과 주구시지만 사람들이 회개하건 안하건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구원하는 구주는 아니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신다 할지라도 이것은 지옥문을 통해서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사람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5:31)라고 하였다. 마치 왕이 반역자들이 회개하고 자기들의 군주의 자비를 바라고 투항하면 용서해 주고, 만일 공공연히 도전하기를 끝까지 고집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우리는 죄로 하나님께 해를 끼쳐 드렸다
우리가 회개해야 된다는 점에는 많은 형평성이 들어 있다.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께 해를 끼쳤으며, 우리는 그의 영광을 가렸었다.  우리는 그의 법을 위반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마땅히 어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우리는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며,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명예를 보상할 우리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5.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도 무차별적으로 구원하신다면 규칙에 준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야 한다. 옛날 오리겐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인간들 아니라 마귀까지도 구원하여야 하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택함과 유기의 범령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가를 모든 사람은 판단해 보라.

다른 사람들보다 회개하기가 어려운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정례의식에 오랜 기간 참석했으면서도 낫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비를 흡수하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6:8)라고 하였다. 속에 오랫동안 넣어두었지만 녹지도 않고 정제되지도 않는 금속은 희망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성직자들을 잇달아 보내면서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서 떠나도록 권고하시고 설득시키시지만, 그들은 형식주의의 찌꺼기에 안주하여 설교를 들으며 앉아서 잠을 잔다.

그리할 이들이 행여나 회개하기에 이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전에 그리스도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21:19) 말씀하셨듯 자기들에게도 말씀하실까 우려해야 것이다.

둘째는, 말씀의 확신, 양심의 억제 그리고 성령의 감동에 거슬러서 자주 죄지은 사람들이다. 양심은 손에 화염겸을 천사처럼 있었다. 양심은 악을 범치 말라고 말해왔지만, 죄인들은 양심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귀의 깃발 아래 결연히 전진하는 것이다.

이들은 회개하기가 쉽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니,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을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24:13)라고 하였다. 빛의 결핍 때문에 죄짓는 것과 빛에 역행하여 죄짓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여기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심의 빛에 역행하여 죄짓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은혜의 성령을 멸시하는 데까지 서서히 진행한다.

6. 하나님께서는 회개치 않는 자들을 질책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바위를 깎아 만든 같고, 비유 속에 나오는 물기 없는 돌투성이 같은 모든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호되게 꾸짖으신다. 병은 유행성일까 두려우니, “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8:6)라고 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대리석으로 만든 단단해져서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7:12)라고 하였다. 그들은 조금도 녹아지거나 참회하는 마음가짐이 되지 않는다. 마녀들은 절대 울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죄에 대한 아무 슬픔도 없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사탄에게 흘린 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그가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때에 책망하시되(11: 20) 라고 하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 하물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죄로 상심하시건만 사람들의 마음은 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말한 것처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 그를 따라가겠노라”(2:25)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천사같이 손에 뽑은 칼을 들고 서서 준비가 되어 있건만 죄인들은 발람의 당나귀만큼도 칼을 알아볼 만한 좋은 눈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등을 때리시건만 그들은 에브라임이 했듯 자기들의 볼기를 치지도 않는다(31:19). 선지자가 터뜨린 슬픈 탄식은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5:3)라는 것이었다. 용광로 속에서도 단단하게 수축되기만 하는 것은 분명히 버림받은 은그릇이다. “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대하28:22)라고 하였다.

완강한 마음은 사탄의 그릇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하늘나라와 겸손한 마음인 것처럼, 마귀가 거하는 장소는 지옥과 완강한 마음이다. 익사케 하는 것은 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속에 누워 있는 것이다. 지옥 저주를 받는 것은 죄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죄속에 회개하지 않고 누워있는 것이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딤전4:2)라고 하였다.

마음의 완강함은 마침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으로 끝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양심을 침묵시켰고, 하나님을 그들에게 화인을 치셨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들로 죄짓게 놔두시고 처벌하지도 않으시니,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1:5)라고 하였다. 마치 아버지가 상속권을 빼앗겠다 작정한 자식에 대해 교정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회개/토마스 왓슨/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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