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2010

제19강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 - 여주봉목사

히12:26-29절입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의 예배가 가운데 하나님이 참으로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거룩한 불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 중요한 한 부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주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본문을 보면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에서 섬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크류온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말할 때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이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예배할지니’라고 번역합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할 때 그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본문에 보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당연히 더욱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리온 모리스라는 학자는 이 진동치 못할 나라는 최종적인 하나님의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통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됩니다. 이 세상 나라는 멸하게 될 것이고 새나라와 새하늘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초침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며 운행하는 임재와 능력이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그 사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하고 하느냐면 우리가 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붙잡을 뿐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자로 합니다. 신약백성인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에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출애굽시대입니다. 시내산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셔서 육성으로 말씀하실 때 두려워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때 흔들릴만한 것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고 하지요. 26절을 보면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이제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약 학개서 2장에 약속된 말씀입니다.
학2:6-9절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보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과도 관련된 구절입니다. 물론 가장 큰 부흥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흔들릴만한 것은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우리 바짝 깨어있어야 합니다. 


지진만 해도 옛날에는 진도 7.0이상은 자주 있지 않았어요. 지금은 너무나 흔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말세에 대한 구절이 마24장 눅21장 막13장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주님이 암하실 때 흔들릴만한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땅뿐아니라 국가도 없어졌다 생겼다 합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습니다. 아시아선교센타 때문에 달러를 주시하고 있는데 900원하던 달러가 1500까지 올랐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흔들릴만한 모든 것을 흔들 것인데 그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세위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신약시대 우리에게 해당되고 재림과도 해방되지만 하나님의 부흥과도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시대가 좋은 예입니다. 말1장 6-14절까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절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짐승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온전한 제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타락하면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지요. 당시 짐승의 피로 드리는데 아니 병든 것은 피가 없느냐 어차피 피를 드릴 것인데. 또 번제는 태워 드리는 것인데 어차피 태울 것인데 좋은 것 나쁜 것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 그래서 병든 것을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9-10절을 보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기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받지 않으셨어요. 그들의 예배가 헛된 예배라고 합니다. 얼마나 그 예배를 싫어하셨는지 성전문을 닫아서 더 이상 헛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행위를 뭐라고 말씀하신다고 표현하십니까?
7절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12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저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게 여기는 것이야!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이 하지도 않은 말은 했다고 하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의 소리가 아니라 행동의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어성경을 보면, 속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속이라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수컷 제물을 가지고도 맹세까지도 했어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그런데 좋은 것은 자기가 갔고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들이 말로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행동은 실제로 하나님의 이 제단을 경멸히 여겨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세요. 두 가지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찬양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서방에서 동방까지 언제 높임을 받으십니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9장에 보면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선하신 성품이 계시됨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해일이 다가오는 것처럼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부흥으로 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은 참된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과 참된 예배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임이 임하는 것과 예배회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와 중보기도라는 십자가복음학교를 했어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하셨어요. 제가 섬기면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참된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시구나를 깨달았어요.

뿐아니라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이번에 예배와 중보기도학교를 하면서 기도중에서도 그렇고 소그룹으로 나눌 때도 그랬고 지금까지 어떤 집회보다도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많이 말씀하셨어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실 것을 어느 때보다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기 위해서는 예배회복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말라기서에 그 당시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가 드려졌어요. 그런 말을 하다가 중간에 이런 말씀을 하셔요. 열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겠고 이방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가 드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는 참다운 예배가 회복될 것이고 참된 예배가 회복되기를 위해서 부흥으로 임할 것도 보여주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참된 예배가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목적 또한 참된 예배가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까 읽은 말라기 1장을 보세요.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누구를 멸시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그럽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격을 말합니다. 여기보면 저들이 예배를 멸시했는데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멸시한다고 반응하십니다. 여호와를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예배를 멸시하면 곧 누구를 멸시하는 것이냐 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심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타락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멸시했는데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병든 것 저는 것을 드린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다른 모양으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가장 살지도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똑같이 저들이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병든 것 저는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근본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중심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1장 6절에서 말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불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주인이라 부르면서도 아버지일진데 공경함이 어디 있고 주인일진데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경함 두려워함을 말하는데 이것이 정확하게 하나님을 경외함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한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예입니다. 삼상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2-17절까지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3-16절까지를 보면 그 당시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제물을 가지고 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제사장들의 하인이 와서 먼저 가져가는 겁니다. 이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크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가장 주된 요인이 무엇입니까? 먼저 제물을 빼앗아다가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얼마든지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시대처럼 제물을 뺏어다가 자신의 배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채찍으로 휘두르며 상을 엎으시고 소를 내쫓았습니다. 그들도 여호와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안보면 표면적인 것만 보고 아 저들은 저렇게 했지만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해답이 12절에 잇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인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을 경외함은 같이 갑니다. 다시말하면 저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예배를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29-30절을 보면 또 무엇을 멸시했다고 합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29절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30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종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자를 경멸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와 아들들은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저들이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멸시한 것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싫었으면 문을 닫아서 제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라고 했겠어요. 또 얼마나 하나님이 참된 예배를 원하셨으면 때가 되면 열방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겠어요. 이와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양은 다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3.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이하를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를 보면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질투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신명기 4:24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함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소명하시는 불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가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라기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의 경우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워지고 주권적인 통치가 거두어집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심판입니다. 거기서 돌이켜지지 않으면 더 큰 심판이 있습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여기서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수록 하나님의 기준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 현실화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예가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레위기 10:1-3절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으로 제사드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불로 제사했습니다. 다른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기준과 방법이 아닌 것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닥쳤는데 제단으로부터 불이 나서 태워죽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은 분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 구절에 답이 있습니다. 9:23-24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여기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신 시대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이 들어가 하나님을 뵐 뿐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예배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이들이 임의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니까 나답과 아비후도 자신들도 제사드리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들도 자기 부모들처럼 자시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심판이 임했어요.


그때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10:9절입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이것을 보면 무엇을 추측할 수 있느냐면 이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술에 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데 술취한 가운데 임의대로 세상의 방법 자기 원하는 대로 다른 불을 드렸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심판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머물러 계신 시대입니다. 심판을 보면서 저는 두려웠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는데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옷을 찢는 것도 머리를 푸는 것도 성전문을 떠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떠나면 그들 뿐아니라 온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약에도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행5장에 나옵니다. 이들이 재산을 팔아서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교회에 가져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을 속였다고 하면서 왜 거짓말하냐고 하자 그 즉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보다 죄를 덜 지어서 지금 살아 있습니까?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면 예배 끝나고 문을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체를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갑니다. 어떻게 이해해야하냐? 앞을 보아야 합니다. 2장에도 나오고 4장에도 나옵니다. 초대교회 중에서 재산을 팔아서 나누었습니다. 


4장 36절을 봅시다. "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대표적인 한 사람이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동기부터 순수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팔기 전에도 네 것이고 판 다음에도 네 것이다. 문제는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렸다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이 교회가 확장되려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에 시기 질투로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할 때 두려운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부흥과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 소중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는 곳에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팀들이 은혜를 받으러 가는데 통역해주면 비용을 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갔습니다. 갔더니 큰 장소에 사람들이 가득했어요. 그분들이 가서 통역하려고 앉아 있었는데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엄청나게 강하게 임했어요. 그래서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복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또렷하게 제 마음 속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에게 있는 기름부음을 건드리지 마 그러면 네 속에 있는 기름부음도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고 하셨어요. 


성령의 기름부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함부로 다루고 비판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지금도 교회안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분들을 함부로 판단하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임재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질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기름부음 거룩함 등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함부로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수록 더욱 강력합니다.
고린도교회를 보면 성찬을 멸시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경외함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오늘 우리예배회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이냐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