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버려라 A. W. 토저 씀 / 이용복 옮김
자아중심적인 삶과 침례
‘인간의 악하고 교만하고 도착적(倒錯的)인 본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라는 문제를 놓고 기독교 안에서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한 가지 입장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많이 의존한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우리의 자아와 이기심과 교만과 도착성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꾸지람 때문에 생긴 강박관념과 왜곡된 개념을 처리함으로써 인간관계 등의 삶을 질을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목양자들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신경정신과로 보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옵게도 기독교 안에는 또 다른 입장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아를 교육하고 관용하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를 끝장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성경의 교훈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자연적 자아와 교만을 길들이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바하와 베토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는 치료법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한 구절로 요약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의 삶에서 요구되는 결단이요 믿음과 헌신의 태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와 교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제 너는 끝장났다. 너는 폐위(廢位)되었다. 너는 더 이상 지배권을 휘두를 수 없다.”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자아 중심적 삶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할 수 있다.
자아를 거부하고 회개하라! 그러면 자아에게 지배당하는 나라에서 도망하여 임마누엘의 나라로 넘어가 영적 승리와 복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군기 아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직도 문제를 일으키는 옛 사람, 즉 자아 중심적 옛 생활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침례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 우리가 행하는 침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물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혹은 물에 젖은 손을 머리에 잠시 얹는 의식으로 전락해버렸다.
많은 사람은 내면에 일어난 영적 변화를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침례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침례는 이기적이고 도착적(倒錯的)인 인간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상징한다.
성도에게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 가운데 그분과 함께 다시 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침례의 본질적 의미이다. 결혼반지가 결혼을 증거하고 상징하듯이 물 침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라
자아의 옛 본성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입장을 양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입장을 조화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하나는 우리의 자아를 끝장내고 영적 승리를 통해 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오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 자아를 헝겊 조각을 붙여서 그것을 수선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영적으로 승리하고 복음 얻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접근법은 당신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공동체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사람의 인격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실 때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의 모든 공동체와 협의회와 단체 안에서 동일하게 그것을 이루신다.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상관없이 말이다.
자아의 옛 생명에 헝겊 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신약은 인간의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가르친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할지라도 옛 자아의 지혜는 거짓된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 안에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새로운 자아, 즉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만이 살아야 한다.
이런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나’, ‘나 자신’, ‘나를’ 위주의 자연적 자아는 죄악으로 가득한 과거를 잊으려고 애쓰면서 끊임없이 옛 것에 집착한다. 자연적 자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으로 변화하려고 스스로 노력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초대한 발전시키려고 발버둥친다.
인간은 창조 때에 부여받은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에 좌절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주신 재능을 우리가 이 땅에서 충분히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뜻을 담은 청사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 각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미래상이 널리 펼쳐져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들의 청사진의 한가운데에는 비바람만 겨우 피할 수 있는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힘들게 발버둥 친 후에는 그 옆에 헛간 하나만 달랑 보태진다.
인간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이더라도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간적 본성이 몸부림치도록 내버려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담도 완성되고, 대문도 세워졌습니다. 지붕은 흠 하나 없이 완벽합니다. 정말로 완전한 집이 탄생했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과 사고력과 창조력이 어느 정도인지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지 않는다면, 아직도 그들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것이다.
잠재의식 속의 욕구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꿈이나 목표를 이루려는 욕구를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충만하고 완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욕구로서, 종종 과거로부터 도피해서 확신 가운데 미래에도 도전하고 싶어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욕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 마음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꿈과 희망에 부응하는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확실히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이 자기들에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아를 지탱해줄 다양한 보조 장치에 의지하고, 교만에 영양분을 공급하며, 자신의 명백한 결점을 숨긴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계속 받으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과 실제 인격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상을, 또 다른 이는 문화를 의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상의 혈통과 자연환경과 가정환경에 의지하여 인간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조상을 자랑하고 목에 힘을 주면서 국가나 문화의 우월성을 내세운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인종적, 문화적, 교육적 우월성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내 본성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분의 도움과 능력이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한다.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풍부한 자원을 갖는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구주께서 그의 중심을 차지하시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실 때 그의 옛 자아는 죽는다. 그의 옛 사람은 “그렇게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모른다.”라고 부르짖었지만, 이제 그의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라고 외치면서 믿음과 기쁨 가운데 평안을 누린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라고 전하고(골 1:27), 계속해서 “너희도 그분(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가르쳤다(골 2:10)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중요한 원리가 담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받아들여진 것을 확신함으로써 믿음과 소망의 본질을 상기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원리이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 말씀을 아는 것이 온전한 영적 구원과 평안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결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
- A.W. 토저 지음 / 이용복 옮김 <내 자아를 버려라>(규장)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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