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2009

꿈 해석과 영성

일반적 접근
 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인간이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자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개의 경우 밤잠을 자면서 수 차례의 꿈을 꾸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경험된 꿈들은 깊은 충격이나 인상이 남는 꿈을 제외하고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의식적 꿈의 활동이 현재의식 속에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시 잊혀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마치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잔 것으로 느끼게 된다. 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필자는 크게 일반적인 꿈과 특별한 꿈으로 구분하려 한다.

일반적인 것으로는 하루 동안에 겪었던 신체적, 심리적 경험에 따라 무의식 속에서 주제와 자료들이 형성되어 꿈으로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격렬한 신체적,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된 날은 꿈도 역시 강렬하게 표현될 때가 많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꿈은 신체와 영혼의 리듬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치유와 회복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인 꿈의 기능과는 별도로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표현되는 꿈도 있다.

불길한 악몽, 태몽,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투시적인 차원의 꿈, 그리고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예시적인 차원의 꿈도 있다. 이러한 꿈은 단순한 신체와 심리 현상보다는 꿈꾸는 당사자나 타인들을 향한 좀더 깊은 인간 내면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꿈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꿈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무의식 속에서 여러 상징들과 느낌 등으로 표현되는 꿈의 언어들은 현재의식에 곧바로 그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는 일은 전문적인 이해와 훈련의 과정이 요구된다. 꿈 해석이 잘못될 경우 자신에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해악(害惡)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타인의 꿈에 대한 해석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편견과 욕심과 비난의 정신에 기울어진 잘못된 해석을 일삼기도 한다. 그러자 현대인들중에는 꿈에 대한 해석을 추구하는 일을 아예 잘못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꿈이란 그저 단순한 일상의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를 간과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심리학적 접근 꿈에 대한 해석이라 하면 누구든지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융(Karl G. Jüng)이 끼친 학문적 공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프로이드 이전까지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히 의식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인간의 의식을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분류하고 무의식 세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강조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함에 있어서 그들이 경험한 꿈에 대한 해석을 활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꿈과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별히 인간의 꿈은 성욕과 생활력의 근원으로서의 리비도(libido)의 작용에 기인한다는 점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은 프로이드가 주로 성적인 리비도에 관련시켜 꿈을 해석한 것과는 달리, 꿈에는 인간 심층 내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인간 무의식 속의 깊은 영역에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집단무의식이란 개인의 무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개인과 관계되는 집단의 공동 의식 세계를 의미한다. 융은 이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마침내 인간 정신의 원천에 도달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인격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위와 같은 학문적 전통에 서있는 심리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인간 내면의 무의식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상징적인 언어를 통하여 언제나 현재의식과 만나고 또 이를 돕기 원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꿈에 나타난 무의식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또 올바른 해석을 통해 현재의식에 적용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과 또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위해 강력한 내적 안내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 접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우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체적, 심리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꿈의 일반적인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이타적(利他的) 목적의 꿈에 대한 소개가 성경에서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꿈은 대개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야곱은 벧엘의 꿈(창 28:10-22)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시면서 후손들을 인도하며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우리는 꿈의 사람 요셉, 선지자 다니엘 등을 통해 그들의 꿈이 올바른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을 본다. 그런가 하면 구약 예언서들의 많은 부분이 꿈과 환상의 기록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신약성경에도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을 막론하고 꿈과 환상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 마리아는 꿈에 천사가 이르는 대로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눅 1:36-40). 요셉은 꿈의 경고를 받아 가족을 이집트로 피신함으로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다(마 2:13-22). 구약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바,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한 예언과 환상과 꿈에 대한 언급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해설에 나타난다(행 2:17).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는 꿈과 환상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한 사도들의 기록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 나타난 꿈들이 대부분 이타적인 목적을 지닌 특별한 꿈이라고 해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꾸는 꿈도 다 이같이 이타적인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투시적이거나 예시적인 꿈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꿈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먼저 꿈을 꾼 당사자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치유와 회복의 관점에서 꿈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도 있다. 이럴 경우, 주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사역 속에서 꿈은 여전히 복음전파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적 접근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예언과 꿈과 환상 등의 직감적인 기능들을 통해 많이 나타났다는 점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에 있어서도 꿈 해석의 전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접적인 계시 주장과 극단적인 예언 활동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몬타누스주의 (Montanism)가 주후 200년경에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3-4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대교회는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교권제도의 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성례전적 영성이 개인적 영성을 압도하게 되었다.

제롬(Jerome)은 이단사설을 억제하고 교권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가르치기를, 개인적인 꿈과 환상보다는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도심과 형식적인 교회 의식을 떠나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영교(靈交)를 추구하기 원하는 자들이 사막과 산 속에 수도원들을 설립하게 되었다. 중세교회는 오랜 동안 프라토-어거스틴(Plato-Augustine) 유형의 실재론적인 영성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을 다시 도입하게 되자, 꿈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서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견해가 학문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스콜라철학의 후기의 경향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을 힘입어 유명론(Nominalism)이 크게 부상하게 되자 신앙과 이성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신비롭고 반이성적으로만 여겨지던 꿈에 대한 해석 문제는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을 정통적 신앙의 권위로 인정하던 16세기 종교개혁교회들은 자연히 꿈에 대한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17세기 유럽의 개신교회들은 교리 논쟁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때마침 불어닥친 계몽주의의 소용돌이는 교회와 전통적 신앙을 합리주의적 비판으로 거의 질식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하여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꿈과 같은 신비적이며 비합리적인 주제는 신학의 냉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인해, 꿈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꿈에 대해 부정적인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적 접근 그러면 꿈에 대한 연구가 과연 신학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융의 심리학적 이론은 신학적으로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종교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쉴라이엘마허에 의하면, 종교의 본질이란 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이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의 구분은 신과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함이 비교되어 죄(罪)라는 관념이 생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융의 심리학적 표현에 의하면, 죄성이란 무의식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분리된 현재의식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융은 집단무의식의 차원을 넘는 곳에 인간의 현재의식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영역은 인간 정신의 신적(神的)인 핵이며 신성(神性)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초월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같은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래적(生來的)인 지각으로서의 신성(神性)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성경의 진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롬 1:19-20).

꿈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꿈에 나타나는 치유와 회복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목표를 지닌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이와 같은 목표는 곧 인간 내면의 영적인 치유와 회복을 중시하는 기독교 성화론(聖化論)의 이상과도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꿈을 다룬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꿈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꿈의 올바른 해석으로 얻어지는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적 성화의 길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꿈을 해석한 한 예를 들어보자.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 아이가 혹시 남들 앞에서 이상스런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꿈속에서조차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이제는 입에서 흰 거품을 내뱉는 것을 보고 큰 두려움을 갖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그 어머니는 꿈의 의미를 몰라 잠시 당황했으나, 곧 기도와 감사 가운데 그 꿈을 기억해 내는 동안, 그것은 곧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자신의 영적 성장에 방해 가 된다는 점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 어머니는 이 점에 대해 깊이 뉘우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날 이후 아이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위의 경우는 일반적인 꿈이 적절한 해석과 함께 현재의식에 이해될 때, 꿈 해석은 영적인 성화의 길을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하면, 그들은 꿈을 통해 자신들의 내적 삶과 외적 삶 사이의 막힌 담을 헐게 되고, 또 꿈을 해석할 때 그들의 영적 가치관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특별한 꿈에 대해서는 어떤가? 이타적인 목적의 꿈, 특히 복음전파를 위한 목적의 꿈이 성경과 교회사의 기록 속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이같은 목적의 꿈이 오늘날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꿈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필요나 영적인 상황을 알려주시곤 한다.

이럴 때 그들은 꿈에 나타난 대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상담을 하거나 또는 직접 물질로 돕곤 한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며 살아갈 때, 성령께서 복음 전할 대상자들을 꿈속에서 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언제 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지시하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이같은 고백들이 진정 신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꿈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신학의 인간론 내지는 성령론의 범주에 삽입될 필요를 요청 받게 될 것이다. 현재 꿈 해석에 관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많은 연구 결과들은 이미 일부 신학계와 영성운동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다.

꿈 해석의 신학적 적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반적인 꿈은 적절한 해석과 함께 할 때 영적 성화를 향한 친절한 안내자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더욱 깊이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타적인 목적의 특별한 꿈이 복음에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다가온다고 보는데, 이를 통하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꿈 해석의 전통은 고대교회의 몬타누스주의 정죄와 교권제도 발생 이후 현재까지 교회사 속에서 줄곧 외면을 당해왔다. 그러나 이미 진보주의 신학계에서는 꿈 해석에 관한 융의 이론을 적극 도입해 왔으며, 현대의 치유사역과 영성운동에서도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높아가고 있다. 융의 이론은 마치 신학계의 진보와 보수 사이를 갈라놓은 격이 되어서, 진보 측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반면 보수 측에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고조되는 관심과 질문은 현대의 기독교가 꿈 해석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어도 책임성 있는 신학적 평가를 내려야만 할 때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