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자비가 이 땅에 펼쳐지는 중에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이다. 우리의 말은 사람들의 심령을 쪼개어 구원을 인도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 반역의 마음이 더 강하게 일어나게 하여 멸망에 빠지게도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선포할 진리는 사람들의 비밀한 마음의 생각들을 드러내고 굳게 만들 것이다.
이사야를 예언적 메신저로 세우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의 말을 듣고 반응하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밝히셨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사야의 메시지를 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둔한 마음으로 그 메시지를 거부해야 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9-10)
이것이 바로 예언 선포자의 소명이다. 우리는 반드시 열린 눈과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함으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왜 예언적 메신저들은 교회 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언적 메신저들이 궁극적으로 다가올 폭풍에 대해 선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에 의해 조직되고,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스려질 위기가 폭풍처럼 불어 닥칠 것을 예언적 메신저들은 선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시는 종의 모습을 다시 입고 오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의로운 재판장의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을 대항하는 모든 이들을 상대로 분노의 전투를 벌이기 위해 오실 것이다. 그분은 대재앙을 통해 신부(교회와 이스라엘)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분은 의의 길 위에 견고히 선 자신의 신부를 핍박했던 모든 자들을 완전하게 살육하실 것이다.
이사야 53장에서 조용하고 온유한 자로 묘사되었던 그분이 10장 뒤에는 적들의 피로 흠뻑 적신 옷을 입고 있는 용사로 다시 묘사되어 있다.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다.”(사63:3)
이것은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마음 깊이 들어가는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은, 살피고, 행동하시며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향해 맹렬히 질투하시는 그분의 본성에 대해서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열방에 선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가장 큰 위기에 처하게 될 때,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사야 40장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그곳을 파괴하기 위해 음모를 구미는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언적인 사람들을 세워 그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선포하게 하실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마지막 역사의 장의 서곡이 도리 모든 사건들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들을 지휘하고 계시다.
그분은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싸우실 것이며, 결국 적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 이사야 40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나라들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주를 대항하여 공모했던 모든 자들은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멸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6-8)
이사야 40장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함께 정하신 모든 일들을 거침없이 행하시는 그분의 자유와 영원하심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예언적 메신저들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진리를 선포하며 온 땅을 위로할 것이다.
이사야 40장은, 또한 이 예언적 일꾼들이 무엇으로 지탱되며 어떠한 것으로 영적인 공급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함, 전능함, 지혜,힘과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식이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이사야 40장에서 예언적으로 언급된 위로자들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예비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마음에 놓인 것을 얻게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처럼 어둠을 점령하며 헤쳐 나간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을 말하는 진리를 선포함으로 떨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옛적 종교서적의 가르침이나 유명한 부흥사의 강의 테이프를 따라 외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오직 한가지로 조성되고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라고 물을 때, 이것은 단지 할 말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정도의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예언적 부르짖음을 추구하는 행동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의 메시지를 붙들었다(요한계시록 10장에 등장하는 작은 두루마리). 우리는 에스겔 3장의 말씀처럼 이 메시지를 좇아야 한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겔2:9-3:2)
요한처럼, 에스겔은 주님의 오라클(하나님의 뜻을 받는 장소)이 되었다.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그가 평소에 알아왔던 정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그는 메시지 그 자체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힘을 다해 먹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우리는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감으로, 이 진리의 메시지를 먹을 수 있다. 이 메시지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그 순간에는 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이사야에게 이사야 6장에서처럼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그 메시지는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메시지를 거부하기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메시지가 우리를 사로잡게 될 때까지, 우리가 그분을 담는 그릇이 될 때까지, 우리가 그분을 담은 그릇이 될 때까지, 우리가 그분의 오라클이 되기까지, 그분의 메시지를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분명, 이 세대의 끝에 예언적 메신저라 되어 있을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다 –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완전하게 이해하지도 못할 것임이 분명함에도, 그들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무언가가 상실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묻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분은 어떻게 느끼고 계시는가? 나는 그분께 어떤 존재인가?” 스랍 중에 하나가 다음 주 주일 설교단상에 나타나 이러한 질문에 답해준다면 어떨까? 그 불타는 존재 중 하나가, 그 영원토록 하나님의 지식을 묵상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가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해줄 것 같은가?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이 열렬한 설명은 듣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멋지게 다가와 그들 모두를 매표시켜 버리지 않을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후에 우리는 하늘의 비전이 쏟아지는 산에서부터 우리에게 가르침을 들려주는 그들에게 질문을 퍼부으며 그들의 대답에 따져 물을 것인가? 아니면 모두 침묵에 휩싸이게 될 것인가? (A. W. Tozer ‘The Knowledge of the Holy’ p7)
스랍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서 타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타오르는 그 불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상상해 보아라. 당신이 할 수 있는 전부는 하나님을 높이며 그분의 이름을 반포하는 것이다. 그럴때, 사람들은 즉시로 치유되고 구원받게 될 것이며, 성령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단 앞으로 달려 나가 그들의 마음을 그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을 아는 여정에 삶을 바치게 될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 한다. 두루마리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선포하고 추구하는 모든 설교자들, 음악가들, 노래 부르는 사람들, 중보 기도자들. 다니엘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단11:32)는 사실을 알았었다. 하는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에 대한 비전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드러낼 사람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이 알코올중독자이거나, 마약상인이거나, 매춘부이거나, 단 한번도 교회에 가본적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누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는 일에 헌신할 수 있으며, 예언적 메신저의 삶에 참여할 수 있다.
바로 지금, 이 땅 위에서, 자기 자신을 기도와 금식의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있다. 감추어진 장소에서 제련되는 일이,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평판과 그들의 자격을 벗겨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영적인 장애물이 놓이게 될 것이다.
논쟁과 거짓말이 하나님을 아는 그들의 지식에 그늘이 될 것이다. 그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 안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런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모든 갈급한 자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잠언 2장에 제시된 여정에 들어선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떠한 메신저가 기도와 금식 그리고 묵상의 광야를 거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힘과 권능과 순결함으로 말씀을 선포하며 전진해 나가리라 믿는다. 참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그들의 굶주림을 채워질 것이다. 그리로 그 지식이 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온 지구상의 도시들을 뒤흔들 것이다. 그들의 삶은 단순한 사실로만 기억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전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실체라는 큰 외침이 될 것이다.
당신이 바로 이러한 메신저가 되지 않겠는가/ 잠언 2장이 제시하고 있는 지혜의 길을 따라가라. 이 길을 찾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분명한 상급이 있다. 그러므로 거룩을 추구하라. 기도와 금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라.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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