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은 지금 교회를 중보 기도사역으로 부르시며 또한 영적권세를 행사하도록 부르고 계신다. 내 마음에 거룩한 부담을 갖고 이야기하건대, 우리는 지금 인생의 불의에 대하여 자기 연민에 빠져 번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전쟁이 한창 중일 때에 우리는 불편이나 불평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전쟁 마인드를 지녀야만 이 시기를 버틸 수 있다. 기쁜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만약 천국이 지금 진격해 오고 있지 않다면 지옥도 그렇게 흥분되어서 날뛰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땅에 부흥과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계신다는 말이다.
세상에 지금 악이 판을 치는 것을 염려하는 반면, 우리는 악이 지금 도처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큰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로 크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어나 싸울 때에 원수의 다각적인 공격이 곧 격퇴될 것이며 심지어 전세계가 뒤바뀔 것이다. 나의 긴급한 요청은 우리 모두 열정과 확신을 갖고 기도함으로 싸움에 임하자는 것이다.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우리는 지금 혈과 육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엡6:12을 보라). 세상을 주관하는 이 영들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문화 위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도 여기에 져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영역에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든 결국 우리의 초점과 승리는 오직 영적인 영역으로부터 나온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히11:3을 보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공격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방패로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 채 기도로써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진정한 평화의 사도 – 나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우리나라는 지금 전쟁을 수행하고 있지만 나는 예수님과 같은 평화의 사도입니다. 주님은 나로 전쟁을 하라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나 역시 평화주의자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나의 임무의 핵심은 바로 화해와 중재(평화)의 사역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평화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우리 발 아래에 상하게 하실 것이다(롬16:20). 평화는 전투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가 영적인 원수들을 제압하고 승리했을 때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와 소극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신성한(hallowed) 평화가 아니라 속이 텅빈(hollow) 평화이다. 그들의 삶 속에는 기도가 없으며, 계속해서 그들은 천국의 원수들과 타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것은 분명 평화가 아니라 속박이다.
예수님은 분명 전형적인 평화의 사도이심에 분명했지만 그분은 담대하게 악에 대항하셨다. 굽힐 줄 모르는 의로움을 가지고 주님은 영적권세의 칼을 휘두르셨다. 주님은 사단의 진영을 기겁하게 만드셨다. 그분이 다가가시지 더러운 귀신들이 소리 지르며 떨었다: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예수님은 전쟁모드를 작동시키고 계셨고 귀신들이 그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단의 영역에 속해있는 모든 악한 영들에게 심지어 사단자신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영적인 권세를 행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분의 이러한 영적전쟁 사역을 가르치시며 그들로 하여금 주님과 동일하게 권세를 행사하도록 가르치셨다(요14;12). 제자들도 전쟁 모드를 작동하는 법을 훈련받은 것이다. 그들은 영분별을 재웠고, 영적권세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인내를 갖고 영적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모든 적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마10:1; 막3:14-15, 6:13, 16:17; 눅9:1, 10:17-19).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눅10:19)이라고 하셨다. 물론 주님은 그들에게 거룩함 안에서 행하며 단단한 기초 위해 그들의 영혼의 집을 지을 것을 가르치셨다. 제자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신 이루 주님은 그들에게 두려움이 아닌 믿음을 심어주셨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분명하게 느꼈던 바는, 예수님께서는 지옥 권세에 대항하여 늘 영적전쟁 모드를 작동하고 그분의 레이더는 원수들의 침입을 늘 감지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지 말것을 간청할 때, 주님은 베드로의 말 속에 숨어있는 사단의 목소리를 분별해 내셨다. 베드로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사단의 영을 직접 꾸짖으시며 베드로의 생각으로부터 그를 분리하여 쫓아 내셨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전쟁모드를 작동한 채 나아갔다. 그들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귀신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들 앞에 굴복하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눅10:1-20을 보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분을 따르며 하늘나라의 전쟁터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측량할 수 없이 온유하신 분이니 영원토록 자비하신 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분은 인생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분명 그러하신 분이셨다(그분의 긍휼하심 또한 악에 대항하는 전쟁의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했던,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소리를 그의 귀로 직접 들었던 그 제자가 또한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1요3:8)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최근에 악한 어떠한 일이라도 파괴하거나 저지한 사실이 있는가? 이번 주에 사단의 억압에 두려워하고 있는 당신 주변의 그 누군가를 구해준 적이 있는가?
악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제어될 수 있다. 그렇지만 슬픈 사실은 역사적으로 우리를 포함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악이 진정으로 제어되는 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우리에게는 악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만약 우리가 다른 영적인 훈련들과 경건의 연습을 이루어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 모두가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불신앙과 두려움을 내어 던져버린다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갖게 될 그 영적인 영향력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바울은 우리의 영적인 무기가 엄청나게 강력하다고 말했다.
만약 실제로 우리가 그 무기를 사용한다고 한번 상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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