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0

제20강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잠언 2:3-5절입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에 대해서 지난 주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려져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하는 이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를 살펴봅니다. 사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 예배 뿐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주요합니다.

1.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닌 것.
경외함이라는 말은 두려워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두려움은 다릅니다. 그래서 경외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닌 것을 살피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1)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경외함을 방해하는 것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키가 컸고 준수했습니다. 외모적으로 볼 때 그 준수함에 압도될 만큼 뛰어났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성령이 부어졌을 때 예언을 했는데 기스의 아들도 선지자중에 한 사람이냐고 소문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요.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3장에 나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말하기를 자기가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전까지 전쟁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일주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기다렸는데도 사무엘이 안와서 제사를 사울이 직접 드립니다. 제사를 끝내자마자 사무엘이 와서 책망합니다. 왕의 나라를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는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때입니다. 


이스라엘 정규군은 3000명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병이 6000명, 특수부대도 아니고 병거만 해도 3만대, 보병인 일반군사는 바다의 모래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규군이라고 해도 3000명 정도였습니다. 일반 농사꾼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을 대치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굴속에 바위 속에 숨었습니다. 전쟁이 안됩니다. 상대도 안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주일을 기다렸는데 사무엘이 안오자 차라리 제사라도 그리고 전쟁이나 하고 죽자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배후에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있었어요.
삼상13:11절을 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여기보면 사울이 그 열악한 상황에서 일주일동안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숨고 두려워하는 상황에도 사무엘이 와서 기도하면 무엇인가 될 것인가라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렸는데 기다려도 사무엘이 안와서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흩어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 하나님 정말 모질다. 우리는 일주일을 기다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거든요. 일주일을 기다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대 제사좀 지냈다고 나라를 빼앗고 다른 사람에게 주시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울의 문제는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질게 느껴지지요.

그러면 다윗을 보세요. 사울이 버림받고 세워진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며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로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그 후로 자기를 기다린 것은 사울의 시기와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블레셋지역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미친 척도 했습니다. 


블레셋 족장에게 피해있을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장 중에서 다윗을 알아본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편을 든다면 협공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전쟁터에서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왔는데 시글락인데 자기들이 없는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여자들과 짐승들을 다 데리고 갔습니다. 이 정도 되니까 부하들이 눈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들어서 다윗을 치려고 합니다.

삼상 3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6절입니다."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 상황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쫓아갈까요? 안갈까요?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갈 참이었습니다. 부하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상황으로 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5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 즉 종교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취하고 상대방의 평가는 중요시하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가는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잇겠느냐?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에서 행동은 상대방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 수 없었고 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어요.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고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평가를 따라 좌지우지하면 사람의 종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이 너무나 팽배합니다. 예배, 시간, 메시지에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심각합니다.

제가 한번은 오래전에 어느 도시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군소교단이지만 총회장입니다. 그래서 그 교단 목사님들이 인사차 많이 오셨습니다. 가면서 한분이 하시는 말씀을 담임목사님이 전해주었습니다. 여주봉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은 다 맞다. 그런데 그렇게 설교해서 누가 교회에 오겠느냐고 하더랍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교회 이렇게 무너지다니 라는 주제로 잡지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드린 적이 있지요. 어떤 분이 제게 매일로 보내준 것인데.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 월례회에서 설교한 내용을 녹취한 내용입니다. 그 제목이 ‘세속화라는 무서운 세균에 한국교회가 감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일부를 읽겠어요.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앞에 앉아계신 장로님이 걸려서 못하고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어느 분이 걸려서 못하고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면 교인들이 마음이 상해서 상처받을까 봐서 못하고 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반토막을 잘라내고 설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이지 않고 먹고 싶어하는 것만 먹이는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부모와 같은 상황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흔들고 신경질내고 짜증을 부리면 절대 못먹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내 아이는 자꾸 편식현상에 빠지고 체질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책망하려는 사람,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려는 사람은 바보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뭔가 좀 사고가 부정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병자취급을 해버립니다. 지난해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서 행사도 하고 집회도 많이 했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행사로 끝났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교역자들의 지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행사로 끝났습니다. 자신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가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안잃었다면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 두려워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야기를 할 때 너무 과하다 생각할 줄 모릅니다. 지난 주에 엘리 제사장을 살펴보았는데 종교적 열정 대단했고 나름대로 아이들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 하나님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면 자기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하다가 자신이 목숨을 잃은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예배가 짓밟히는 것은 그의 생전에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도 살았고 이스라엘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자녀들을 타일렀고 종교적인 열심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자녀들이 하나님의 예배를 짓밟는 것을 방치했을 뿐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예배로 자기 배속을 먼저 채웠을 때 동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워놓고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건 엘리건 우리들이건 문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 두려워함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순서, 방식을 어떻게 할지가 사람의 평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마저 사람들 두려워해서 타협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는 사람이 주인되어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사람을 두려워함입니다.

2)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인도할 때 두려움을 가지고 인도합니다. 고전 12장을 보아도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이끌리는대로 끌어갔다고 합니다. 무당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새벽마다 일어나서 목욕제개를 하고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꼬지를 당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고 하니까 마귀가 하는 것처럼 공포로 인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롬8장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사단의 영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바라는 말은 아빠라는 말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릅니다.

롬14: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요일4:18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마귀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움이 있다면 치유받아야 합니다.

3)종교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합니다. 종교적인 두려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종교적인 두려움이란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주일날 식구들과 함께 놀러가야 하는데 예배도 드리지 않고 가면 사고가 날까 봐서 예배라도 드리고 가려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의미로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1부 예배 나와 예배하고 갑니다. 이 말은 가족들과 놀러 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1부 예배 나오면 잘못되엇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해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과는 상관없이 종교적인 두려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전혀 받지 않으시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데 십일조 안하면 하나님이 칠까봐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물론 십일조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십일조 뿐아니라 우리의 경제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 올바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 경제영역을 간섭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게 청지기로 살지 않으면서 경제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함께하기를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까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아니라 종교적인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지 않습니다.

2.하나님을 경외함의 정의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 예배 뿐아니라 신앙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1)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고 감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의 한 측면입니다.

시33:8절입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히브리어에는 평행법이 있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함을 말합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거의 모든 영어성경은 그분을 경외함으로 감탄하여 서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치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저는 금강산을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구비 한구비를 돌아가면 감탄이 나온다고 합니다. 속리산은 규모는 적을지 모르지만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옵니다. 


이처럼 아름다움을 보면 감탄이 나오는데 그것이 경외함이라는 말입니다. 경외함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감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말은 영이시기 때문에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속성을 전체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에 감격하여 감탄하여 서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아도 경외함이 있으려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능력을 자신을 아름다움을 계시하셔야 합니다. 그때 그 아름다움 앞에 감탄하여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경외하는 것이 항상 같이 갑니다. 렘2장을 보아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을 경외함이 같이 갑니다.

좋은 성경적인 예가 출34장입니다. 출3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섭니다. 그러자 3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34장을 보면 하나님이 영광중에 임하십니다. 임하시면서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 말은 이름으로 자신의 성품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 영광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면서 5-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임하셔서 영광된 성품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의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죠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1737년 내 건강을 위해서 숲 속으로 말을 타고 가다가 ......”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감격하여 서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강력하게 사모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치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을 만나고자 원하고 그분의 성품을 더 알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갈망하고 울부짖으면서 주님을 찾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요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왜 그 갈망하며 사모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하시는 싸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은혜가 감사하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2)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열적으로 사모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방해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듭니다.
첫째는 모세입니다.
모세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물기를 열정적으로 추구했습니다. 출3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 128:1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한다고 하셨는데, 모세는 철저히 하나님의 길을 추구하고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주님의 길을 보여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것, 주님이 목적하신 바를 알게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주님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는 것에 삶을 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알게 해주시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은총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이 경외홤이 엘리 속에 있었다면 사울 속에 있었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 속에 있다면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생명이 회복될 것입니다.

둘째 예는 바울입니다.
빌3장을 봅시다.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알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가장 아름다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향해 갔을 뿐아니라 방해하는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지속적으로 달려갔습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소망입니다.

히12:1-2절에서 말합니다."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눈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요 완성하신 분이시다. 달려가는데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달려갈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주님 안에 있는 가장 값진 보화를 발견하고 달려가되 방해하는 요소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의 다른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요소를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3.경외함의 유익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을 경외함은 같이 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들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1)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죄를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출20:20절입니다."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거절하고 죄와 싸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이기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내를 보고싶어 하고 갈망하면 다른 여자들은 안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되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업ㅂㅅ음을 인식하고 주님이 오셔서 통치하시고 다스리기를 소망하며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2)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시25:12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친밀함이라는 단어는 원탁회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회의, 하나님의 비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밀한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한다는 말입니다. 이 비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엘리사에게 하나님은 적국의 작전회의까지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적군들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지요. 그런데 불병거와 불말을 보내셨어요. 친밀함은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잠2:3-5절입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8:12절 이하입니다.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지식과 지혜는 예수님에 대한 상징입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구하되 숨겨진 보화를 찾는 것처럼 찾고 찾으면 하나님을 경외함을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조상 몇 대 내려오는 집에 살고 있는데 청소하다 보니까 집에 엄청난 보화가 숨겨있다고 써 있어요. 그렇다면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남들 몰래 뒤지고 찾고 찾고 바당을 파고 벽고 헐어보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구하면 찾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그렇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배만 해도 왜 경외함이 절실하게 필요한가? 가장 먼저는 삶에서 주님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보화가 되는 것이 내 삶입니다. 주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아서 내 온 삶으로 동참함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삶의 만족이 없습니까? 주님을 몰라서 그럽니다. 여러분에게 삶의 의욕이 없습니까? 주님의 목표를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니 내 문제만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집회를 갔다가 남편이 천억대의 재산을 가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돈 때문에 염려되고 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을 자기 못하고 뜬 눈으로 샐 때가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지요. 몰라서 그럽니다. 인생에 만족이 없는 것은 주님을 몰라서 그렇고 목표의식이 없는 것은 주님의 목적을 몰라서 그럽니다. 진짜 바울처럼 주님의 목적과 목표를 알아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면 여러분에게 진정한 삶의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열망이 우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3)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진실로 보호하십니다.
시34:7절입니다."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31:19-20절입니다."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4)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시34:9-10절입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프리카에도 집회를 가는데 사자가 왕입니다. 젊은 사자가 왕입니다. 젊은 사자가 주일 정도면 다른 사자는 다 죽습니다. 김정일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이면 다른 사람은 다 끝난 것입니다.

주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모든 선한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IMF가 닥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무조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선한 것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후6장 3-10절에 보면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생명들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주님을 따라가면서 받은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쁨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라가려면 대가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먹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넘쳤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것들이 없이 돈 많이 벌었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5)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말4:1절입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6)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시147:11절입니다."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7)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말3:16-18절입니다."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8)하나님의 눈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머물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많은 축복들을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회복에 대해서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렘32:37-42절입니다."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 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회복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들안에 하나님을 일심으로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삶을 도울 것이며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마음과 뜻을 다래서 그곳에 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부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며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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