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0

제22강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여주봉목사

빌3:3절입니다."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께 반드시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지난 주에는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배와 성령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성령에 의한 예배입니다. 빌3장 3절은 참된 성도의 특징 세 가지를 말하면서 한 가지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은 당시 이단들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쓴 구절입니다. 교회를 보호하고자 쓴 구절입니다. 예수를 믿을 뿐아니라 할례를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었어요. 할례를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브라함의 정통후손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을 바울은 개들이고 행악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수를 믿을지 몰라도 결국 자기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지요. 이들이 개들이라고 하면서 진정한 성도가 누구인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자라고 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우선 우리말 성경은 성령으로 봉사한다고 번역하지만 라트류언테스라는 말로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예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예배하다는 말입니다. 주된 영어성경을 보면, 성령으로 예배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복음에 대한 구절입니다. 참된 신앙에 대한 구절입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며 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이 우리 신앙과 복음에서 얼마나 중요한 핵심적인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예배에 대한 구절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구절, 복음에 대한 구절인데, 그 구절에서 예배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전통이나 형식에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에이든 토저는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참된 예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활동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와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가 아닌 다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감동의 불을 끄고 그분의 인도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생각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이단이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할 방법을 아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다고 합니다.”

알티킨들도 빌3장3절을 기초로 예배에 대한 책을 쓰면서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예배가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려면 세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1.성령의 인도를 따라는 예배 
2.성령의 조명과 예배, 
3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예배입니다.

1.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
우선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특별히 신약시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전3:6절입니다."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여기보면 새언약은 신약을 말합니다. 신약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이 아니고 영에 의한 삶입니다. 문자에 의한 삶이 아니고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율법조문에 의한 삶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구약의 삶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하신 구약의 삶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조문에 의한 삶으로 구약의 삶을 이해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율법조문에 의한 삶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이스라엘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랍권과 여러 번 전쟁을 했는데 한번은 속죄일에 쳐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은 이스라엘이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반격하는 일을 일로 여겼기 때문에 총에 맞으면서도 반격을 못했습니다. 그날로 전쟁이 끝났다면 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반격을 해서 전쟁에 이겼지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오늘날 유대인들이 그럽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앙은 특별히 새언약은 율법조문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삶이라고 합니다. 율법규정은 죽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느냐? 우리 노력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조문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행실과 노력을 의지해서 서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한 삶이 새언약의 삶입니다. 그런 삶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하면 우리 믿음 신앙 구원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의 예배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찬송입니다. 시편을 성령이 감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핵심이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부흥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예배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님이 덜 나타나게 되고 여러분은 신약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게 된다는 것을 언제나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이 즉흥성입니다. 이 살아있는 내밀성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감화력에서 떠나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의 여러 형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침체기의 교회가 예배의식에 있어서 보다 더 형식적이며 예배형식을 채용하여 공기도서나 의식으로 돌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적인 종교의 한 부분입니다.”

참다운 예배는 성령이 운행하셔서 하나님과 교제가 핵심인데 예배가 타락하면 핵심은 빠지고 절차와 형식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타락할수록 예배가 형식화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부흥 때의 예배는 형식적인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참다운 예배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인도자부터 성령께 민감해야 합니다. 모든 예배인도자가 그래야 합니다.

제가 구체적인 방법을 찬양인도자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찬양인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 예배가 성령의 인도가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찬양인도자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까 하는 선곡에서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찬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주일에 어떤 말씀을 가지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전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 23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에 하나님이 뒷받침하십니다.

둘째, 찬양인도자는 선곡 뿐아니라 준비할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예배라고 해서 준비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만 해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다고 하면서 준비 하나도 하지 않고 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고 해서 준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즉흥적으로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와 준비가 어떻게 같이 갑니까? 설교의 예를 들까요? 하나님이 어떤 말슴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을 통해서 등등 말씀합니다. 그러면 준비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어떤 부분을 강조하기를 원하십니까? 함녀서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예배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에언하라고 하는 책을 보니까 그레엄 쿡 목사님이 쓴 것인데 그분은 예언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예언도 마음의 부담부터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마음을 품으면 기도하는 중에 길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개인과 교회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의중과 뜻이 무엇인지 서는 것입니다.

셋째, 실제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찬양은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찬양은 리허설이나 공연이 아닙니다. 찬양을 공연으로 이해하면 기계적인 예배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준비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이것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예배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지만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설교자도 이렇게 준비하고 그 다음에 원고를 찢어버리고 올라간다고 합니다. 준비한 것을 토대로 서되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는 것입니다. 아까 그 예언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준비되어서 실제로 감동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이끌어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인도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즉흥성입니다.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의 한 특징은 즉흥성입니다. 즉흥성이야말로 우리의 예배가 참된 예배인지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든 예배 시간에 끊임없이 늘 즉흥성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예배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그분의 의중과 계획을 알리셔서 인도하시는 즉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챨스 스펄젼 목사는 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무질서가 있기를 추구했습니다. 로이드존스도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하나님이 예배에 함께하시는데 그 예배에 즉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알티 킨델 목사도 참되고 열정적인 예배의 특징은 즉흥성이리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와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운행하심으로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을 보이시는 그런 즉흥성이 있었던 적이 언제 입니까? 까마득합니까? 그렇다면 우리 예배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순서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순서로 굳어져버린 형식적이 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직접 주님을 찾고 구하고 배우고 그러면 뜻을 보이십니다. 그 길에 우리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돌이키고 주님을 따라 갑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체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참다운 예배의 특징이 즉흥성인데 그런데 즉흥성이 까마득하면 우리 예배가 형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갈망하고 화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즉흥성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얼굴을 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나님의 임재도 성령의 운행하심 성령의 주도권도 거기에 함께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광고 때 말씀드렸는데 일부 성도들 가운데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그분들이 집중적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분들이 집중적으로 주님을 찾았다면 다 해결될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즉흥성에 있어서도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비례해서 성령의 운행하심이 다를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의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교회에서 성령께서 임재를 거두셔도 교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중에서 90%이상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 때는 성령께서 임재를 거두시면 개점휴업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성령님으로 가능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분이 떠나셔도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듯이 90%이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교회 뿐아니라 한국교회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2.성령의 조명과 예배
지난 주에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한 진리입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모든 삶을 좌우합니다. 예배만 해도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서 그분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요16: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엡1: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의 진리에 입각한 예배가 되게 하려면 성령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이 부분을 두 가지 면에서 살펴봅니다.
1)성령의 조명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때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수5:13-1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원수편이냐 우리편이냐 우리편이면 와서 돕고 원수편이면 내가 싸울 것이다. 

그러자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합니다. 내가 전쟁을 주관하는 자로 왔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대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이 사자가 야곱이 씨름했던 사자입니다.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신 그분을 인식했을 때 여호수아는 납작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당시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네 주권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네 삶을 내 발 앞에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내가 네 삶의 온전한 주인으로 삼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땅은 거룩한 땅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을 대 똑같은 말을 했지요. 우리 주권 우리 생각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엎드립니다. 여호수아가 군대장관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주인되신 여호와 앞에 엎드립니다. 종으로서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할 자세로 엎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인식되었을 때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군대장관으로 운행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 앞에 납작 엎드릴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여호수아처럼 모세처럼 우리 모든 삶을 그분께 드릴 것입니다. 우리 시간 물질 에너지를 드리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는 자세로 엎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리고성부터 가나안 성들을 정복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요구하시는 자세가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정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뿐아니라 그분 앞에 우리 삶이 드려지고 올바로 순종하는 자세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예배입니다. 단순히 입술뿐아니라 삶이 예{배고 섬김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섬기다는 말과 예배하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문을 여셔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그분의 아람다움을 알게 된다면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경배함으로 엎드릴 것입니다.

2)뿐만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때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친밀함을 열어주는 가장 주된 통로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해주고 가꾸어줍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고 이처럼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의중을 목적을 계획을 계시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인도하시고 의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친밀함이 예배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서 이런 친밀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당만 밟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절박함으로 찾아야 합니다. 고민하고 기도하고 사모하고 목말라하며 찾아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예배가 됩니까? 기도하려고 하면 가만히 있어도 기도가 나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입을 열어 구하고 찬양하고 높이기 시작할 때 그분이 함께하기 시작합니다.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셔야 참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더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오늘의 만나로 살아야 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그렇다고 환경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지도 않은데, 매일 어렵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렵다고 아우성치면서 사람을 의지하면서도 무슨 배짱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다윗의 장막에 있는데, 당시에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데 제가 인도하고 있었어요. 찬양팀도 있었지만 기도시간은 제가 인도하는데 하나님이 한 부분을 선명하게 보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하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밥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래요. 그런데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그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저를 대접도 하고 칭찬도 하지만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한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서 제가 취할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났어도 내가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기름부음이 한 것이니까. 내가 얻은 것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함으로 섬겼느냐였어요. 그런데 제 자신을 보니까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보여졌어요. 찬양을 인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보이니까 깜깜해져요. 캄캄한 가운데 있는데 제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하나님이 인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열방을 구하라 내 아들아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찬양을 같이 했냐면 ‘구하라 모든 열방들을 유업으로 네게 주리라’를 했어요. 


30분정도 했어요. 그때 있었던 분들도 지금 있지만 30분 동안 성령께서 그 자리를 압도하셨어요. 지금은 하나님이 열방을 열어가시고 계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배양시켜 줍니다. 그래서 예배와 하나님의 친밀함은 필수입니다.

3.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려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면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예배였습니다.


고전 14장 6절 이하입니다."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성령의 나타나심을 말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은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고전12장 7절을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은사를 나타나심으로 말합니다. 이 의미는 춤추는 손이라는 두 개의 라틴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예배를 지휘하심으로 능력과 은사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타났던 것이 초대교회의 예배였습니다. 


특별히 고전 12-14장은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모일 때 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즉 예배의 문맥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자유롭게 은혜 가운데 운행하시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최종적으로 준비하면서도 하나님이 이런 것을 보여주셨어요. 포도나무 교회에도 이런 부분이 더 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최소한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더 좋은 공간이 있어야 되고,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예배는 일정한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타락했습니다. 껍데기만 있습니다. 


예배가 한 시간에서 5분만 지나도 신경을 쓰지요. 그것이 어떻게 예배입니까? 텔레비전 앞에서는 두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어떻게 만군의 하나님을 예배하러 온다고 하면서 피로 값주고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5분만 늦어도 인상을 쓰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배를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예배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이 운행하시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환영해야 합니다. 오셔서 운행하시도록.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자유롭게 운행하시며 나타나시도록 사모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반대하는가?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갈4장에서 바울이 이삭과 이스마엘을 두 종류의 신앙체계로 비유합니다. 이삭을 참된 복음인 십자가 복음 이스마엘을 거짓신앙체인 율법주의로.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율법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가장 대적했던 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부흥을 대적했던 사람들이 율법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로이드존소는 죽은 정통주의라고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은 전통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열심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심은 성령의 외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정통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열심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중략 열심을 혐오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교회사와 친밀한 사람들 특히 부흥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부흥의 시기에 있어서 가장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 그 당시에 대적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나타남 때문에.
죠지 휘필드 그 당시에 대적을 받았습니다. 성령 때문에.

요한 웨슬레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예배만 해도 그냥 정해진 순서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할 때 항상 대적했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 가운데 오셔서 이런 일들을 행한다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적지 않은 교회에서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쫓겨날 것입니다. 그처럼 형식적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해서 거부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중 하나가 고전14장 40절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개역성경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는 구절을 들어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보에 나오는 순서대로 질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전 14장 4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 하는 말씀입니다. 대부분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서로 방언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유익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방언으로 하지 말라 통역이 없으면 알아들어야 유익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또 자세히 보면 그들은 예배할 때 하루 종일 예언했던 것 같아요. 또 동시 다발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하지 말고 예배시간에 그래서 어떤 사람이 방언하면 통변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도 두 세명만 해라. 그것도 순서대로 해랴. 한 사람이 하면 다른 사람은 들으면서 분별하라.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하던 사람은그치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는 말은 주보의 순서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예배시간에 섬길 때 질서대로 해서 유익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에 좋게 보이는 예배를 위해 신경을 쓰지만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우리 예배는 성령에 의한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그 한 부분이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배입니다.

오늘 저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 성령의 조명이 핵심이고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포도나무교회가 그런 예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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