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09

'십자가' 중심의 복음


복음적이 아니면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은 교회를 복음적인 것으로 바뀌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항상 복음 뿐이다는 말이다. 복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은 스스로 복음적인 교회를 낳기 때문에 교회를 일단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복음적 교회를 바꿀 수 있는 재주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더나아가서 기존 교회를 복음적 교회로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복음적이다.

복음의 발생처는 하늘이다.
하늘 나라에 복음이 나온다는 말은 이미 세상 모두가 종결 체비에 돌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늘은 지상에서 볼 때 감추어진 세상이다. 그런데 그 감추어진 하늘 세상의 비밀에 땅까지 전달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완전한 거룩의 차원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작업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롬 16:25-27) 즉 하늘 나라나 이 세상 나라는 비상 세태에 벌써 들어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 정죄의 신호탄은 십자가 사건이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영광의 주'를 못 알아보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지혜이며 이런 지혜에 대해서 하나님은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단체의 일종으로서의 교회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며 진정 중요한 것은 복음에 관한 관심사 유무이다.

십자가가 하늘의 감취었던 비밀이라면, 그 비밀은 하나님 입장에서 봐서도 가장 심오한 내용의 위치에 있다. 즉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통달했음의 증거는 오로지 십자가에 관해서 바른 이해를 하고 있느냐로 판정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어떤 식으로도 이 '하나님의 깊은 곳'을 통달될 수 없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11) 사람은 자기 지혜로 산다. 갖추어놓은 지혜로 무엇이든지 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지혜가 엉터리 지혜라는 것이 판명이 났다.

인간들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뒤 이은 그 분의 부활로 근거로 하여 인간 지혜의 무용성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폭로당했다. 인간은 자기 영 안에 갇혀 지내며 자기 지혜 안에 포로잡혀 있다. 부활도 알지 못하고 십자가의 지혜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지혜라고 품고 다닌다. 이러한 인간들의 교만함을 향하여 하나님은 반()지혜적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인간의 지혜로움의 차원에서 봤을 때, 십자가는 아예 어리석음의 범주에 있기를 자청했다. 지혜로움에서 출발하여 지혜로움으로 대화하겠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리석음으로 마중 나간다. 접속이 될 리가 없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남기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 자력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자는 예수님에 의해서 소경으로 판정 받는다. 십자가에 관한 내용도 동일하게 이것과 이어져 있다. 인간의 어떤 지혜도 십자가와 연속되는 지혜는 없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십자가 지혜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지혜가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십자가는 본래의 십자가가 아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임의로 창안해 낸 멋진(?) 십자가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끌어낸 총지혜의 집합체로서 가짜 십자가이다. 사람은 어리석음을 겁낸다. 어리석음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혜로서 극복하려든다. 그러나 이런 노력 또한 소경의 지혜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서 출발하므로 필히 십자가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인간들의 종교적, 철학적 지혜와 접촉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허락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를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지혜, 즉 십자가의 지혜는 계속해서 어리석음으로 일관하는 그 속성으로 인해 인간 쪽에서 싫어지도록 만든다. 이것은 구원이 하나님만의 능력으로 실시하겠끔 하는 원리원칙이다. 세상에서 기대하는 지혜와 기적과는 의도적으로 고리를 끊는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이 본문의 취지는 인간의 전도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 행위 자체가 십자가의 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만의 능력에 기초한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즉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능력에 기초한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데"( 15:14)

참된 전도란 계속해서 어리석음을 견지해 주어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 접속이 가능한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허락해서는 아니된다. 소경이기에 소경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만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인간들로부터 '어리석음의 극치', '어리석음의 폭발'이라는 소리가 절로 듣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었다. 그래서 남겨진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간주하는 그 어리석음을 구원의 도로 확실하게 다지셨다. 십자가의 도의 기능은 모든 인간을 소경 되게 하는데 있다. 소경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자를 비로소 보는 자로 간주하고, 제대로 봐왔다고 하는 자를 소경으로 규정짓는 기능이다.

인간은 자기 지혜를 버려야 한다. 그것을 고수해서는 아니된다. 인간의 그 어떠한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바로 죄로 인하여 '알 수 없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형체로서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을 알 수 있는 발판인 것처럼 여겨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인간들의 상상 속의 신 개념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모습이기에 두말 하지 않고 내동댕이치고 싶은 인물이요 어리석음의 대변자와 상대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리석음의 신학이 예수님 입에서 쏟아져 나왔으며 어리석은 미래상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한 자가 사람들 등살에 못 이겨 세상에서 쫓김 당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된다는 이 시나리오가 얼마나 통째로 어리석음의 덩어리인가!

바로 이 어리석음을 배후를 알아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부정하고 철폐하시기 위해 이런 작전을 펼치시는 것이다. 인간의 죄악된 지혜를 지혜라고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죄라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의 어리석음 앞에서 판정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십자가에 나오는 모든 것과 비교가 된다. 즉 살아있는 인간과 십자가 달려서 죄인으로 죽게 되신 예수님과 모든 것에서 빠짐없이 하나 하나 비교된다. 인간의 하소연과 희망과 포부 같은 것이 모두 자기 지혜를 근거로 해서 터져 나오는 가증한 것들이다.

자신의 소경 됨과 어리석음은 인정치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불성실성과 무능함을 비난하게 되어 있다. 나름대로 신학이라는 이름의 지혜와 종교성이라는 지혜를 확보하고 있으니 이런 지혜들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믿음조차도 사람의 지혜에서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인간들이 소지하고 있는 신학이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그 죄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인간이 구축한 신론은 그 어떤 식으로도 십자가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대신할 처지에 있지 않다.

구원론도 마찬가지요 종말론이나 기독론이나 계시론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다 십자가를 대신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을 정죄하는 차원에서 종말 때에 말씀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종말 때에는(오늘날에는) 이미 말씀이 성취 차원에 놓인 상황이 되어 있다. 말씀의 전파는 그 임무를 이미 완료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0:18) 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 말씀은 땅 끝까지 이미 전파된 상태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 전파된 말씀대로 움직여 나가는 현상만이 시시각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 예가 그 다음 구절에 바로 이어진다"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슬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10:19-21)

즉 이사야 65:1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 들어서서 그 완성도를 충분히 표출하게 되는데 그 확실한 증거로서 이방인들이 주께서 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동시에 유대인들은 시기나 있다. 이것도 또한 말씀이 이미 완성된 현상들이다. 그러니까 말씀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취력을 발휘하는데 그 장이 바로 오늘날의 현 세상이다 는 말이다. 이러한 말씀의 스스로 됨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이성을 철저히 공박하고 배제하기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유감없이 이 말씀 안에서 완성태로서 작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신학, 철학, 과학, 종교성이 결코 말씀을 손톱만큼도 성취시키기 못한다. 이것들은 되레 말씀의 성취성을 모독하려 들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했다.

이제부터의 전도는, 십자가의 도가 곧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임을 증거 하는 전도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전도가 아니요 하나님의 일에 협조와 지혜를 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도리어 이미 완성된 구원의 능력이 자기 백성을 임의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실행해 옮기기 위한 전도이다. 고린도전서 1:26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하셨다.

문벌이 좋아서 불러주신 것도 아니라 반대로 문벌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의 지혜를 초월해서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으로만 부름을 받는 자만이 참 성도가 된다. 그만한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는 이유는, 십자가 능력만이 구원의 능력으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한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여기서 '주 안에서', 기존 세계와 대비된 세계의 존재를 근거로 하는 말씀인데 기존 세계는 하나님께서 아예 저주를 퍼붓기 위해 '율법 안'의 세계로 규정지어 놓은 상태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율법에 의해서 철저히 정죄당한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5)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이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될 능력이 있는가 탐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확인되면 후속 구원 처방을 새로 장만하기 위해 그냥 철수해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공격용이다. 철저히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 찾아든 것이다.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 '자랑하는' 행위는 가증된 행위이며 저주를 부르는 행위이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 자랑'은 끝났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3:21) 오직 주님만 자랑거리로 남는다.

'자랑'에 관한 문제 뿐만 아니라 낙담하거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나 실패 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허용이 안된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자신의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인간은 자기 지혜와 더불어 노을 속에 지고 같이 무덤에 묻힌다. 그런데 무덤의 진정한 의미는 각자가 판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이 시대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심판 앞에서 인간들이 그 동안 절제하며 통제하며 조절하며 관리해 왔던 모든 것들이 소용없는 짓이었음이 드러난다. 귀한 생명의 사라지는 그 면전에서 느끼는 허무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의 저주받은 생명으로 출생하게 된 연유를 그 동안 미처 몰랐다는데서 오는 쇼크이다. 십자가는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통해서 오늘도 전파된다. 진노의 그릇을 긍휼의 그릇으로 바뀌게 하기 위해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되어 버린 십자가의 성취성이 이 시대에 맞는 확인절차를 나타내는 것이다.

누가 구원이 되었던 누가 구원이 아니되었던 십자가의 위력은 실수가 없고 빈틈이 없다"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느니라"(고후1 1:20)

결 론
사도는 우주의 본질을 보았고 우주의 비밀을 알았다. 복음을 알게 된 자는 더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누가 되었던 마찬가지이다.

신에 관심있어 매달려 기도하고, 교회에 관심두고, 기독교에 관심있고, 신학에 관심을 두고 매진하는 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인간들의 자기 지혜를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다. 일종의 자기 과시욕과 자랑거리 만들기와 관련있다.

복음이란, 십자가만을 하늘의 지혜의 근원으로 삼고 거기서 부활과 재림과 모든 성령의 사역을 유발시킨다. 따라서 참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 여부를 알자면, 부활과 예수님 재림과 모든 성령의 사역과 결과와 열매들을 논하면서 결국에는 십자가의 스스로의 능력에만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가를 확인하면 된다. 만약 인간들의 자질이나 양심이나 능력이나 교회의 능력에 기대를 건다면 이것은 복음을 빠트린 유사 교회에 해당된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나 교회의 존재 가치를 무시한다면 이 땅의 세계에서는 참으로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더욱 복음을 복음이게 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하늘의 감추인 비밀'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움직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복음의 가치만을 드높이게 위한 정죄의 심판의 대상으로 우리 눈앞에 꾸준히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을 믿자!

<출처: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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