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인은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귀로 들은 것을 이야기 한다 -
침묵의 쌍둥이 같은 친구가 있다. '경청(敬聽)이'라고 부르는 친구인데 이
구 친구는 어딜 가나 붙어 다니는 둘도 없이 친한 사이이다. '침묵이'가 '경청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경청이는 침묵이가 외롭고 힘들 때 어김없이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청이는 침묵이를 늘 풍요롭게 한다. 경청이가 침묵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침묵이라는 친구가 자신을
'경청이답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경청이는 늘 생각한다. '만약 침묵이가 없다면 경청이 자신도 없을 거라고....' 또 침묵이는 생각한다.
'만약 경청이가 없다면 자신은 얼마나 외로울까?라고.
우리는 침묵을 더올리면 경청이라는 말이 함께 떠오른다. 우리의 삶에 침묵만큼이나
꼭 필요한 덕복이 경청하는 것인데, 바로 침묵이 경청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요 또 다른 면에서 경청은 침묵의 깊이로 더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시간이든 혹은 여러 사람 사이에서든 침묵과 경청이 함께 일어날 때 비로소 침묵고, 경청도 의미 있게 된다.
말이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도 상호 소통이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병
서로 말을 하고 이해를 하는 것 같은데도 서로의 뜻이 어긋나 무엇인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원인은 대화를 하면서도 침묵속에서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할 이야기만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청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견해로
남을 설득하거나 논쟁하려 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듣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말을
할 때에는 자신이 중심이 되지만 들을 때는 상대방을 중심에 놓고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듣는 것 Hearing과 경청 Listening은 질적으로 다르다. 듣는
것을 말하는 사람의 말소리를 귀로 듣는 것에 그치는 수동적인 행위이고, 경청은 침묵 속에서 마하는 이의 말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 의미까지도 듣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런 경청은 침묵 엇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과 경청은 참되고 창조적인 대화의 길이다.
우리 시대의 최고 사상가였던 함서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진리는 근본에 있어 계시된 것이라면 우리 할 일은 듣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엇이냐, 듣는 존재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시는
것이다.
'예는 예라 하고 아니는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죄니라' 듣는 자는
대답한다. '예'라고 하든지, '아니'라 하든지.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라 하는 일에서 다른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알아듣는 것과 알아듣거든 그것을 듣는 것이다."
경청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할 수
있다. 설교 또한 경청의 결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침묵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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