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2010

침노하는 자 [마태11:1-19]

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부분을 영어 성경인 NIV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오고 있으니 침노하는 자는 그것을 붙잡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전후 문맥을 살피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약이 언급한 메시야가 오는 예언이 성취되어 주님이 오셨는데, 요한은 바로 그 메시야를 준비하는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보다 더 큰 기름부음이나 더 큰 사명을 감당한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 임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서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는데 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온 자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할지라도 그는 요한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면보다도 더 큰 영적인 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들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엄청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나 히브리서 등에서 보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어진 그 놀라운 은혜가 그들에게 부어진 은혜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십자가를 압니다. 거기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섭니다. 거기서 비롯된 모든 은혜를 받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이 성도들은 그림자만 알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실제를 알고 모든 영적인 실제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적은 성도라 할지라도 구약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였던 성도들보다 더 영적인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되 그에게 임한 영광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가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듯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은혜가 심지어 모세가 보았던 은혜보다 더 큰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다” 는 말은 종합적으로 볼 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침투조처럼 오셔서 거점을 확보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키심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어두움의 세력을 파괴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이 확산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로부터 그 나라는 강력하게 확산되어지고 있습니다. 말세지말에는 말할 것도 없이 더 강력하게 확산되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산되어지는 본보기가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주님의 사역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재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는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교회 가운데 주님의 사역이 더욱 더 회복되기를 열망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이땅에 임했습니다. 어두움을 이기고 사탄의 세력을 멸하여고 사탄의 일을 파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세를 당하면 더욱 더 땅끝까지 확장되고 확산될 터인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자는 침노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침노하는 자는 어떠한 자들을 가리킵니까? 우선 본문은 침노하는 자의 반대가 어떠한 자들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24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기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피리를 분다”에서 그 배경에 무엇이 있나요? 결혼식이 있습니다. “애곡하여도” 그 말 뒤에는 장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은 신나는 것입니다. 그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장례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장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의 장래는 장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통치가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목표, 내 주관, 내생각, 내가 원하는 바, 내가 원하는 성도들의 기준 등과 같은 나의 통치가 있고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 쓰임받는 것은 신나고 기쁜 일인 반면에 우리 자신에게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침노하는 자의 반대입니다.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무결단, 둘째는 사모함이 없음, 셋째는 무회개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능력으로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한 반응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와 사고를 버리고 근본적인 하나님의 삶의 방법과 목표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가운데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하셨음에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죄가 아니구요, 주님은 사모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시바 여왕의 비유를 들면서 “솔로몬에게 임한 하나님의 지혜를 보기 위하여 시바의 여왕은 보물을 들고서 솔로몬을 찾아 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음에도 너희들은 사모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모하지 않았던 것도 죄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방문은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이 어떠한 경로로 왔던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우리가 듣고 “오, 그래! 참 은혜롭다” 하고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 방문 그 자체가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엄청난 은혜를 주시는 반면에 그것을 거역하고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고 사모하지 아니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침노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저는 오늘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타난 침노하는 자들의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을 위해서건, 사역을 위해서건 두 가지 동기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과 사람을 향한 긍휼(Compassion For People)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을 살피겠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밝히신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 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4 32절입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주님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 30절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 우니라

14:31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또 반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던 날이 안식일임을 아시면서도, 유대인들이 반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아버지께서 오늘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하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성전을 깨끗이 하시기 위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던 자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기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의 집을 향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주님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는데 이것에서도 예수님의 살아가는 삶이나 사역 모두에서 중심,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차고 넘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님에게 욕하고 대적하고 반대하건 상관없이 아버지의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양식처럼 하셨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아셨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기의 모든 삶을 불태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역의 확장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입니다문둥병자가 와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사” 혹은 “불쌍히 여기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여인이 자기 배 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과 애착과 긍휼함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인 성의 과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자 장사 길에서 우는 눈물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청년아 일어나라” 고 외치시며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는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 하나하나에 이러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9 35절부터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볼 때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으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전도하시고 사람을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이 단어가 있었던 것입니다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까지도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행위가 죄인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을 위해서건, 사역을 위해서건 두 가지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과 사람을 향한 긍휼(Compassion For People)입니다.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역의 가장 온전한 모델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이구요 더 나아가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한 편으로 보면 예수님은 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따라왔기에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워 놓고 제자들을 적당히 세워 관리 할 수 있었습니다. 제 말이 맞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안하실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셨습니다. 이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목회관이나 신앙관에서 보면 예수님은 참 모난 분이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 37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예수님이 손님으로 초대받고 가셨습니다. 38절부터 입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모난 분이신가를. 주님은 지금 손님으로 초대받아 바리새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대단히 모난 분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손님으로 어느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화있을진저” 하면서 주인에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45절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한 율법사가 기분 나쁘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하죠. 얼마나 우리 주님은 모난 분이셨던지. 여기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는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까 제자들이 말하기를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들이 기분 나빠할 텐데요” 하였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가만 두어라 하나님께서 내게 붙이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자가 없노라”

예수님에게 있었던 두 가지 동기 즉 주님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누가복음 6 22절과 23절 그리고 26절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의 실패자입니다. 그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아 왔는데 커다란 교회를 지어서 많은 사람을 동역자로 세워서 충분히 관리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의 자질에서 보면 주님은 목회자의 자질이 없었던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4 25절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지금 수천 명의무리가 주님을 *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서만 끝났으면 좋을 텐데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도 그런대로 이해하겠는데 망대 비유를 드셨습니다. 또 전쟁의 비유를 드셨던 것입니다. 3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목회자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고 있는 제 설교가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전 지금 신앙의 기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적당히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모가 나셨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중심을 시험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여러 군데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두 군데만 예로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하신 행동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이 안식일인줄 아셨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감동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데 하나님께서 이날이 안식일인 것을 깜빡 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곧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그들의 중심을 드러내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먹는 것이 큰 일중의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능력으로 배가 불렀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부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잘 다독거리고 잘 양육하여 거대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기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몰라도 정말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 3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짐승의 피도 마시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목매달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피체 먹지말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식인종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아 어렵도다” 하면서 예수님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도 예수님은 오늘날로 칠라면 실패한 분이셨습니다. 오늘날에 관점에서 보면 주님은 목회자의 자질이 없었던 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것은 예수님에 삶과 사역 속에 나타난 침노하는 자를 보이기 위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난 침노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사도행전 1장을 보십시다. 1 12절에서 15절까지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아까 말씀들인 것인 것처럼 오늘날에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방법이 틀린지 오늘날 목회적인 방법이 틀린지 분별하십시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 삶은 제자들을 키우는 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침노하는 자들을 선별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왔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아도 20세이상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굶으면서까지 사모하며 예수님을 *알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서 말씀드린 과정들을 통해 거의 모든 사람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들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신앙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몇 명이 남았는지 아십니까? 120명이 남았습니다. 이들이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아셨던 분입니다. 이들을 분별하시고 이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목회 관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돌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도록 건드리셨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매우 모나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과정을 통해 남은 것이 바로 이 무리들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분별되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침노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또 어떤 자들이 침노하는 자들일까요? 침노하는 자들은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침노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주님의 오실 것을 예비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어떤 자들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들일까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노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삶을 모두 드려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그 중심부에서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때론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괴로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삶을 다해 예수님과 동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키시던 주님은 이 시대에도 우리들을 들으셔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노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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