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시간 내내 주님께 너무 죄송해서 울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닮지 못했는지... 그 실상이 보여져서 괴로웠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못했던 저의 모습은 너무나 추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주님의 형상과 성품을 나타내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너무나 맘이 아팠고 괴로웠습니다.
주님께서 청진기를 들고 저를 진찰하시고 계셨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고침 받길 원하니?"
저는 간절히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 고쳐주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고쳐주세요. 제 안에 주님 닮지 않은 어떤 것도 담아 두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 고침 받고 싶어요. 지금 고쳐주세요..."
제가 주님께 무언가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수술 동의서였습니다. 그것을 받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이제 저를 만지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제 심장에 느껴졌습니다. 저의 이기적인 마음을 새롭게 고쳐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깨끗지 못한 입술에, 욕심 가득한 배에 주님이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추한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너무 괴로웠지만 주님께는 전부 드러나지길 원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고침받길 원했습니다.
"주님, 저를 온전한 주님의 형상으로 고쳐주세요..."
그때 주님께서 왜 수술동의서를 받길 원하시는지 깨달았습니다. 너무도 인격적이신 우리 주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만 실제적으로 주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병을 진단 받기를 원하고, 또 실제로 자신의 병을 알게 되지만 수술 받기를 원치 않아서 주님이 고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중보기도학교에 모여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 손에 수술동의서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기뻐하며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들을 만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술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자신의 병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너무나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 너무 죄송했습니다. "제발...주님께 나아 오세요..주님을 좀 보세요..."
주님이 우리를 만드셨기에 주님이 가장 훌륭한 의사로서 우리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만지심으로 아름다운 주님을 온전히 닮는 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 (내사랑예수님)
몇 주 전, 중보기도학교에서 김옥경 전도사님의 기름부음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에 관한 소망이 마음 안에서 강력하게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부터 계속 이 기름부음을 위하여 아침에 눈을 떠서 기도드리고 차 안에서도 기도드리고 기도시간에도 기도드리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지 않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저의 자아들을 발견한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정말 저의 숨은 자아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며칠 지나면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제 안에 있는 ‘자기 의’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 자랑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제 안에 ‘자기 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 안에 있는 강한 자아 즉, ‘자기 의’ 세 가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더 보여주시면 더 나오겠지요. 그러면서 제가 지난 몇 년간 겪었고 그때보다 경하지만 지금도 겪고 있는 불같은 시련에 대하여 저는 단순히 주님께서 제 헌신을 받으셨고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제가 꼭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뿐 아니라 저의 강한 자아, 아마도 가장 강한 자아 두 가지를 죽이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첫째, 저는 여성으로서의 자아가 강하였습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친구들로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도 많이 듣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여성으로서 소중하게 대접받아왔습니다. 20대 초반에 육적인 실수를 하여 상실감도 컸지만 회개 후 하나님께서는 제 내면으로부터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자책감 없이 사람들이 저를 소중히 여겨주는 것을 마음껏 감사할 수 있었으며 여성으로서의 제 존재 자체를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저는 여성으로서의 제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으로서 마음을 아름답고 지혜롭고 사랑스럽게 하여 그에서 저절로 풍겨지는 매력을 지니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 안에서 이성관계는 당연히 깨끗해야 되겠지요.
이성간의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그 상대를 소중히 여기며 실망스럽다고 해서 배신하거나 돌아서지 않으며 한 사람이 마음에 있는 이상 절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이지 않으며 그러나 관계가 끝나면 슬플지라도 깨끗이 잊으며 등등 제가 정한 저의 기준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잘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의 자긍심이 되었고 자기 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에 보상해주시는 듯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여성으로서 존귀한 대접을 받게 하셨으며 이것이 제가 주님께 드리는 깊은 감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지내는 중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저의 소중함보다는 여성으로서 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조금 더 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게 순전한 사랑이 아닌 성적희롱으로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서 항상 발끈하였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심해야 할 거래처직원과 말을 함부로 한다고 싸웠고,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닌 음흉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본 몇 사람들의 눈을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소름끼치도록 싫어하며, 남동생이 성적희롱 비슷하게 제게 장난칠 때마다 제 목소리는 격해지면서 싸웠고 남동생은 그것을 재미있어 했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을 소중히 여겼건만 주님께서는 죽음 같은 끔찍한 시련을 통하여 여성으로서의 제 자존감을 많이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해서는 짜증을 좀 낼 뿐 발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적희롱에서 나온 음흉한 눈빛들이나 마음들은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싫습니다. 이럴 땐 그 마음들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제가 지금 당면한 문제입니다. 하여튼 이렇게 제 자존감이 많이 낮추어진 덕분에 저는 요즘 여성으로서의 제 자신보다는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제 자신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용사로 거듭나게 하신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둘째, 저는 제가 정직하다는 ‘자기 의’가 강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떡볶이나 냉면을 사먹기 위해 부모님께 책값을 더 받곤 했던 기억은 있지만 거짓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주님을 알고 거짓말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는 제 마음과 제 입술이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 늘 애썼습니다. 심지어는 하얀 거짓말까지도 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한 거짓말은 물론이고 상대에게 유익하다 할지라도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칭찬이나 위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느낀 부분들을 상대의 유익을 위해 열심히 말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제 일생 중에 제가 거짓말을 한 기억들은 거의 없습니다. 기억력이 좋지 못하여(사실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머리에 별로 입력시키지 않습니다.) 대충 이야기하다가 거짓말처럼 된 것은 있어도 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의도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선명하게 기억나도 상대가 우기면 내가 틀렸나보다 그러곤 말았습니다. 그러나 선명하게 두 번 거짓말한 것은 기억납니다. 하나는 10년 전 쯤 마음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고 하나는 몇 년 전에 반 거짓말한 것입니다.
둘 다 회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그리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저하고의 관계는 아니니까요. 그러면서도 제 마음 속에는 ‘나 같이 정직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하는 자긍심이 밑바탕에 항상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몇 년간의 끔찍한 시련을 통하여 이것도 다루셨는데 사람들이 저의 진실성이나 신실성을 의심할 때마다 많이 발끈하였습니다. 영적회오리가 몰려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입술로 표현함으로서 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내면에서 싸우는 싸움조차 약해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께서 근래에 알게 하신 자기 의는 기독교인으로서 잘 성장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돈 문제를 다루셨는데 돈에 대한 사용에 대하여 오해를 받을 때마다 안에서 발끈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돈에 대하여 청지기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자기 자긍심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자기 의’가 막연하게 발견만 되어지고 심각한 의식은 없을 때에 주님께서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의 기도를 시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 전에 변목사님께서 ‘자아묵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설교시간에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라도 의도적으로 제 자신을 칭찬하거나 남들의 칭찬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와는 거리가 가깝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의 기도 직후 저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회하고 돌려서 엄청난 자아묵상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아의 대발견’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그것은 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좀 더 나은 내 자신을 만들고자 좀 더 바른 행동을 하고자 하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잘 진행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지자 어느새 저도 모르게 제가 잘한 행동이나 요즘 같으면 성령님의 이끌림을 잘 받은 행동이나 뒤돌아보면서 그러한 제 자신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운행하심으로 일이 이루어진 것 뻔히 알면서도 주님께서 하셨다와 그러한 제 자신을 즐기는 것이 제 안에 섞여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주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전부터 막연히 알고 있었던 저는 후에 제가 사역하게 될 때에 사람들의 많은 찬사로 인해 제가 착각에 빠져 교만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변목사님께서 그 분 자신을 철저히 아시고 그 분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과 그 분 자신을 분명하게 분리시키신 것이 느껴질 때마다 얼마나 목사님이 부러웠고 그 기름부음을 위해 안수를 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덕이 안 될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자아의 대발견’으로 말미암아 이제 조금 자신이 생겼고 지금은 ‘자아묵상’이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자아묵상’하던 일을 ‘주님께 영광’으로 온전히 전환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며칠 더 지나자 하나님께서는 제 안에 있는 강한 ‘자기 의’들을 다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이 아닌 주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저의 의를 보게 하셨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잣대는 다 제가 만든 것이지요. 정직하다고요? ‘자아묵상’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엄청난 속임수가 제 안에 있었습니까? 돈 문제요? 순종하지 않아 혼난 적도 있고요, 물건은 판매인 마음 상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도로 깎지요.(판매인 마음 상할 것 같으면 후다닥 더 드립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기 의’들 때문에 즉, 나는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의식 때문에 주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것과 제 자신을 즐기는 것이 쉽게 분리되지 않고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제게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이 누구이신지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그 분은 평소에 제가 잘 알고 있는 바대로 너무너무 순결하시고 너무너무 거룩하시고 너무너무 고상하시고 너무너무 의로우시고 또 너무너무 크시고 전능하시고 높으시고 등등..
그런데 그 분을 면전에서 대면하고 있는 제가 그 알량한 ‘자기 의’를 내세우며 주님과 경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제가 그랬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자 저는 제 자신이 너무너무 창피하고부끄러웠습니다. 저를 향한 성령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열심히 여쭈어보며 교제했지만 그 거룩하신 성령님 앞에서 저의 의가 얼마나 초라하고 알량하고 누더기같은 지 제 자신이 부끄러움으로 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겨자씨만큼 되었습니다.
제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졌습니다. 전에는 성령님께서 제가 마음 놓고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나이 많은 친구같은 느낌이어서 그 분을 왕으로 인식하고자 애써 노력하여도 잘 되지 않았었는데 이 때에는 정말 주님께서 거룩하신 권위를 가지시고 보좌에 앉으신 모습으로 제 안에 가득하게 계셨으며 저는 그 분의 발치 끝에서 그 분 발가락 사이의 먼지만한 모습으로 그 분께 엎드려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영광 돌려드려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제 마음자세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제 자신이 누구인지 좀 더 분명하게 알고 좀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 그리고 제가 죽어진만큼 주님으로 채워져서 주님을 그만큼 더 사랑하며 경외하며 주님의 영광으로 살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를 옳게 파악함으로써 거짓에 속아 어이없는 실수나 착각에 빠지지 않고 바르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계신 성도님들은 현실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바르게 살 수 있지만 이 세상은 속임수 투성이이거든요. 주님을 좀 더 실제적으로 알고 싶고, 그러면 그럴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분을 좀 더 실제적으로 인식하면서 그 분께 더욱 깊이 빠져들고 싶고, 주님의 영광으로 살면서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하여 좀 더 강력하게 천국을 침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계속 기도하다가 이틀 동안 진통을 겪어서 조금 힘들어지면서 주춤했지만 그래도 그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저에게 ‘자아의 죽음에 대한 기름부음’을 계속 내려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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