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그릇된 생각 세가지
1. 율법주의(legalism)
율법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과오는 이미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성령은 바울을 감동시켜 영혼을 죽이는 이러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쓰게 했으며, 이 편지가 로마서이다.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은혜로 된다는 내용이다. 이 논쟁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성구로 결론을 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 반율법주의(antinomiamism)
율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주장으로,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성령을 죽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령은 신약성경 중의 한 책을 쓰게 했으며, 이것이 야고보서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율법에서 구함을 받았으나 율법 없이 그저 내버려지거나 율법 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 즉 생명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을 자유의 법이라고 하며,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랑의 법이다.
이 법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얻거나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얻는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 사실을 야고보는 다음 구절에서 요약해 말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수 있는가? 정말로 그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이 성경 말씀을 다른 성경 말씀처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그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가? 그리고,
둘째로 그 말씀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법칙을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에 적용시켜 보자.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죄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지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앞에" 즉 "하나님 보시기에" 라는 말이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겠는가? 그 대답은 분명하다.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람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행위"로 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그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고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 "뿌리"이며 행위는 그 "열매"이다. 바울이나 야고보는 다 같이 아브라함의 생활을 예로 들어서 믿음으로 또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했다. 바울은 야고보와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일에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약속한 사실을 믿었을 때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다는 예로 삼았는데, 여러해가 지난 다음 아브라함의 생활에 나타난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야기를 인용했다. 거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위는 바로 그의 믿음의 겉으로 드러낸 결과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증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이 말씀 가운데 그 아들을 "드릴 때에" 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아브라함은 이미 30년 전 하나님을 믿은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이제 그가 그의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의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반율법주의" 즉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장에 대해 답변해 주는 말씀이다. 이러한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심각한 과오중의 하나이다.
3. 갈라디아주의(Galatianism)
이 명칭은 이것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 영혼의 원수의 교묘한 속임수이다. 율법에서 해방된 우리에게 다시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있다고 속임으로써 우리를 율법에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그릇된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성령은 사도 바울에게 한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부분적으로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일축했다. 그 서신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믿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아, 아니오.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믿음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그 구원은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 의해 보존되는 것이오. 당신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예리하게 반박을 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 3)"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은혜로 구원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는 그 구원의 선물을 여러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려고 애쓰고, 잃어버릴까 벌벌 떨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분이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여러분의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다음 단어들에 특별히 주의하면서 다시 한번 갈라디아서 3:10 을 읽어 보라.
"누구든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도 역시 사도 바울이 질문한 대로 그러한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은 왜 그처럼 어리석은가? 성령으로(은혜로) 시작되었는데 이제 와서 당신은 율법의 행위로 완전하게 된다(보존된다)는 것인가?
[출처 : 율법이냐 은혜냐 (엠알 디한 저), 생명의 말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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