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09

내적 치유의 원리

성경 인물들의 내적 치유 일기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치유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저는 저의 글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도서출판 진흥)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그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서 이 원리들의 전체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을 읽기를 권합니다.

그러한 이해와 함께 이 책을 읽게 되면 이 책이 더 깊이 열려지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날마다 치유하는 가정”에 나오는 원리들을 다소 수정 보완하여 요점만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글을 읽어나가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 째로 이 책을 읽기 위하여 전이해(前理解)로 필요한 것이 성경을 읽는 구속사적인 관점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름다운 구속의 이야기를 이끌어오셨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저서 브라이드 성서연구 시리즈 제6권, 구속사적 설교-부흥회 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도서 출판 진흥)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로 보면서 풀이해 나간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전체적인 구속사, 객관적인 구속사를 다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적 치유 일기에서는 이러한 객관적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구속사, 주관적인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적 치유 일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내적 치유”에 대한 의미와 “구속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은총이 먼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외적, 내적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처가 나타난 상처이든지 아니면 감추어진 상처이든지 간에 모두가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또한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상처들 가운데는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상처가 있는가하면 결혼하고 나서 뒤틀어진 부부관계로 생기는 것들도 있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에 성폭행이라든지, 편애, 가난함, 신체적 열등감, 버림받음, 아동 학대, 신체적 정신적 장애 등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영적인 억눌림, 낮은 자화상, 허무주의, 분노, 성인아동, 자폐증, 강박증, 정신이 산만함, 냉소주의, 죄책감, 수치심, 자기 방어, 합리화, 과거에 얽매임, 상처에 얽매임, 자기비하, 자기무시, 완전주의, 불신감, 의심, 우울증, 불안, 신경쇠약, 복수심, 자기 비애, 공포, 두려움, 원한, 자멸적 행동방식, 열등의식, 우월 의식, 교만, 피해의식, 자포자기, 책임전가, 무기력증, 소외감, 과대망상증, 의존증, 질투, 버릇없음, 미움, 체념, 일 중독증 등등의 증상으로 나타나서 함께 사는 이들을 괴롭게 만듭니다.

문제는 상처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는 이러한 상처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상처를 치유 받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성경 인물 40명에게도 우리와 비슷한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고 성장, 성숙해졌는가하면 어떤 인물들은 치유 받지 못하고 영원히 그 상처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인생을 마치기도 하였습니다.

내적 치유의 의미
치유에는 몸의 치유, 영의 치유, 감정의 치유, 귀신들림의 치유가 있습니다. 몸의 치유는 신체적으로 질병을 앓는 것에 대한 치유입니다. 문둥병환자나 귀머거리 등을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은 몸의 치유였습니다. 또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쳐주신 것은 영적인 질병의 치유였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와 같은 키 작은 세리장이의 열등의식을 치유하여 준 것은 정신적, 내면의 치유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치유이외에도 정신병자들, 혹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인하여 얻은 질병을 치유하는 귀신들림의 치유도 있고 상처를 위한 내적 치유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치유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외부로 나타나는 외상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는, 숨겨져 있는 어떤 상처들을 치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숨겨진 상처는 외상과는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되고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본인도 그렇게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외부로 보이는 상처들은 열심히 치료하지만 내부에 숨겨져 있는 상처는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가 성격, 인간관계, 인격, 믿음의 생활 모든 것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상처에 대한 예들은 많이 있지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 “당신은 너무 키가 작아”라고 말할 때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각각 반응이 다를 것입니다. “아담하고 좋은데요”“작은 것이 더 아름답지요”“별로 불편이 없어요” 등등으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벌컥 화를 내면서 “저의 키가 작아서 불만이 있습니까?”하면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키 작은 것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들은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때에 “불시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상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것을 내면의 치유라고 말합니다. 마음 속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의 상처들을 근본적으로 먼저 치유하면서 전인격적인 치유를 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적 치유에서는 가정의 문제들을 다루게 될 때에도 먼저 치유하고 지나가야 할 상처가 없는지 살펴봅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 즉 진정으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이것부터 치유하려는 것이 내적 치유입니다. 곧 원인치유라고 보면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
40명의 치유일기 가운데 치유 받지 못한 상처의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울 왕, 헤롯 왕, 그리고 가룟 유다가 이 예로 나옵니다. 상처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치유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내적으로 감정에 남은 상처들은 치유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치유 받지 못 할 때에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상처를 이용하여 사단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 상처에 일생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한 여인은 20세 된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에 살아있는 일생동안 그 무덤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소일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산 사람은 바라보지 않고 죽은 사람만 바라보며 자신의 귀한 인생을 소비하였습니다. 사단은 그 여인을 아들을 갑자기 잃은 상처에 일생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여인은 삶의 모든 즐거움과 부요를 잃어버리고 일생 슬픔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사단은 상처에 얽매여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은혜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성장의 출발이 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상처받은 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회복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시고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지만 사단은 이것이 “끝”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엄청난 상처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사단은 감정의 충격을 받고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상처에 얽매이게 합니다. 그리고 일생을 슬픔과 고통, 상처, 저주, 분노가운데 살게 합니다. 이렇게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모든 생활에서 파괴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더욱 내적 치유가 필요하며 주님의 도움 앞으로 나아 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그 상처를 통하여 자신의 나라와 다스림을 쉽게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영원한 주치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질병을 갖고 있는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질병이 영적인 질병인지, 아니면 내적 치유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신체적인 질병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은 먼저 우리의 질병을 분별해 주시고 진단해 주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영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중풍병이 생겼음을 이미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하실 때에도 그 여인의 내면에 남아있는 정신적 공포, 두려움을 먼저 치유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삭개오를 치유하실 때에도 그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심으로 낮은 자화상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을 분별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통전적으로 온전하게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능력 있는 주치의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병 고쳐 주시는 목적은 평강과 거룩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질병과 상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시면서 평강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건강한 상태는 하나님과 이웃과 누리는 살롬, 평강입니다. 아무리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여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고 하여도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이웃과의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하면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살롬이라는 말이 가장 건강과 가까운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동기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병을 고쳐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저주와 질병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병과 상처를 고치시는 가장 큰 능력은 그의 사랑이며 그의 눈물입니다. 그의 눈물은 우리를 향하신 가장 큰 약입니다. 그 눈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고 치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실 때에 “병든 삶”까지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보이는 병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의학이 발달하여 (불치병도 있습니다만) 엄청난 종류의 질병들이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암도 이제는 극복하는 단계에 들어갔고 에이즈도 조만간 치유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하여 거룩한 예배자, 거룩한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삶, 성결한 삶,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렇게 “병들고 지친 삶, 악하고 패역한 삶”을 치유하는 약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병들고 찌들은 삶, 중독 되고 부패한 삶, 음란하고 더러운 삶까지 치유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치유해 줄 수 없는 부분까지 주님은 근본적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미리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와 질병을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병 고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쳤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치유를 베풀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동기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온전하고도 통전적인 치유를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과 평강을 누리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웃에게는 사랑을, 하나님께는 예배를 드리는 자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의 행복과 건강, 풍요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한 치유의 길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처를 들고 나오게 되면 그 곳에는 온전한 치유의 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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