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2009

정체성의 위기 – “영적인 생각”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육신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대조하고 있다. 육신적인 생각은, 죄오 인해 더렵혀지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 무디고 어두워져있다. 하지만 육신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매우 밝다. 지적으로 훌륭하지만, 영적인 실체에 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3:7). 바울은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성령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영적인 생각이 있어야 한다.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도 고투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세상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생각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40).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 말씀을 하기 직전, 마르다는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면 악취가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르다는 육신적인 관점으로 보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관점을 바꾸시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육신적인 생각은 내가 보면 믿겠다라고 말한다. 영적인 생각은 내가 믿으면 보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영적으로 밝아지는 것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1:17-18).

오직 하나님의 빛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날마다 게시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걷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지성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에 관한 가장 단순한 개념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지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게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6-17)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영적인 생각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이미 주어져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영적인 마음을 기경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계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간구하라. 지적인 지식과 추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셨고, 그것을 사용하기는 기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인간적이고 지적인 지혜를 성령보다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영적인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신다.

<출처: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바비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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