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랍비’(rabbi)였다. ‘랍비’란 문자적으로 ‘나의 큰 자’를 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생님!’ 하고 부르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랍비’라는 호칭을 율법 전문가이자 선생인 서기관을 존경하는 뜻으로 부를 때 썼다.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라 불렀다. 예수는 당시 랍비들처럼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가르쳤다. 예수는 당시 유대 율법의 전통에 관련하여 혁신주의자로 간주되었다. 바리새인들에 의해서는 심지어 신성모독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원칙없는 급진 개혁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율법의 정신을 살리고자 하였고, 모세와 선지자의 정신을 계승한 자였다. 예수는 역사상 모든 선생 중 가장 위대한 선생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이 독특했을 뿐 아니라 그는 가르침대로 살았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랍비로서 예수
예수는 ‘랍비’(선생)라고 호칭을 받았다.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좇으면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 1:38)라고 질문한다. 예수 자신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하여 종교적 선생으로 인정함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스스로 랍비의 제자가 되어본 적은 없었다.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 규례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가르쳤다. 예수는 율법 규례의 외형적 준수(안식일 준수, 정결 규례 준수 등)에만 치중하는 당시 종교관례를 무시하고 율법의 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율법 선생들과 회당의 지도자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양심있는 종교인들은 예수를 진정한 ‘랍비’로 생각하였다. 니고데모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인 니고데모란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예수의 사상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형식적인 적용을 거부하고 그 동기와 내면성을 철저히 하는 방향으로 율법의 정신을 해석하였다. 예수는 손을 씻는 등 형식의례적 정결 요구보다 내면적 순수성, 즉 내적 정결을 강조하였고. 안식일의 외면적 준수보다도 안식 제정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는 외적 정결법과 안식일 법과 관련하여 유대 장로들의 전통과 마찰과 긴장을 일으켰다. 예수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면적인 것(씻고 씻지 않음)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것(음란, 탐욕, 살인 등)이며, 안식일에도 병든 자의 치유를 위하여 병 고치는 일, 가축을 위험에서 구출해 내는 일 등은 안식일 정신에 맞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시 제도적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는 율법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윤리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모세 율법의 차원을 하나님 나라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던 것이다.
예수의 교육방법
첫째, 예수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는 간음하다 현장에 붙들린 여인에 대한 송사(訟事)에서 땅에 글을 쓰신 것(요 8:8)만을 제외하곤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쳤다. 예수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의 밭에 뿌리셨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예수의 교훈은 사실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정제된 가르침이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고친 일(마 12:10),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청년과 대화(마 19:16), 제자들의 서열다툼(눅 9:46). 세금을 내는 일(마 22:17) 등에 있어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비록 2천년 전의 일이나 이 일이 지니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예컨대, 안식일에 회당에서 반신불수(한쪽 손 마른 사람)를 고치는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논란을 일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그리고 예수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다. 여기서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안식일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셋째, 인격적 감화를 통하여 내담자의 내면의 삶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도록 하였다. 예수는 밤중에 자기에게 찾아온 니고데모의 경우 그에게 중생의 진리를 가르쳐 줌으로써 외형적 율법종교의 굴레에서 벗어 나오도록 하였다. 예수는 행실이 좋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가르친다. 그녀는 변화를 받는다. 예수는 자기를 배신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다짐하시면서,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 그러면 “내 양을 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베드로가 내면적으로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인도하신다.
넷째, 듣는 자의 처지에 자신의 입장을 세워 놓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급히 말하지 않았다. 빨리 처방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예수는 처음부터 모두 믿으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셨다. 초보의 믿음을 가진 자도 환영했다.
다섯째, 비유를 사용하였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사용하였다. 복음의 전파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장)로 설교하신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교하시는 의도는 슬기로운 자는 이해하나 미련한 자는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복된 소식이나 여전히 비밀이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눅 8:10). 마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여전히 비밀의 복음이다. 듣는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 사람만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를 아는 원리와도 연관된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역사적 예수를 바르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 교육의 일반적 원리
첫째, 예수는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고 친구로 대했다.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누가복음에는 요한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눅 13:23). 사도 요한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울 만큼 예수에 대하여 친근히 느꼈던 것이다.
둘째, 예수는 인내를 가지고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사랑이 동반되었다. 강압적이지 않고 독단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양식과 양심에 호소하셨고, 강제적으로 독단적으로 동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능력을 가졌으나 기적의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셋째,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의 입법자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셨다. 제자들 스스로가 주어진 각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통찰력과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예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 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37)를 들려줌으로써 질문자가 스스로 해답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바울은 예수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 “의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하였다(고전 3:6).
넷째,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사셨다. 예수는 친히 허리를 동이고 수건을 들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예수는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예수는 교행일치(敎行一致)의 삶을 사시고, 진정한 스승의 도가 무엇인가를 모든 선생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선생 이상의 존재: 권위 있는 존재
예수는 선생 이상의 존재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쳤으나 서기관이나 당시의 랍비들과는 달랐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이 영적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가도 가버나움에서 예수가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예수에게 있는 선생 이상의 권세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그리고 예수는 단지 가르칠뿐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앞서 말한 바같이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과 영적 권세가 동반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하나의 위대한 선생으로만 보고자 한다. 또는 그를 단지 윤리적 스승으로만 보고자 한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며 위대한 스승이며, 윤리적인 위대한 규범적 존재이다.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예수를 신적 의식에 충만한 인간, 리츌(A. Ritschl)은 직업의식에 충만한 사람, 헤르만(W. Hermann)도 예수를 종교의식이 충만한 인간, 프랑스의 소설가 르낭(E. Renan)은 탈콤한 휴머니스트라고 평가했다. 예수에게 이런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를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는 스승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 있는 그의 영원한 신성을 향하여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신앙만이 역사적 예수를 그의 신성의 원천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 다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골고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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