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전통’을 깨뜨리면서 그 ‘정신’을 구현한 분
예수는 유대교의 율법 전통을 깨뜨리면서도 그 정신을 잇고 있는 분이다. 그는 율법 종교의 틀에 넣을 수 없다. 율법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자유로운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전통 율법 종교를 비판했고,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예수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 자체를 부정하거나 규범을 부정하는 해체주의자는 아니었다. 예수는 자기 정체성을 지닌 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장 개방적인 자였다. 그는 자기 헌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이웃을 위하여, 타자를 위하여 산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탁월하신 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오늘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타당성이 있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중의 한 명인 하워드 스나이드(Howard Snyder)는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심을 구현하신, 궁극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이실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것은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을 초월하고, 그 꼭대기에 서 계시다는 사실이다.”(Howard Snyder, The Earthcurrents, The Struggle for the World's Soul, 1995, Abingdon Press, 김현석 역, 2000년대 지구동향, 아가페, 518).
율법 종교의 비판가 예수
복음서 저자 마가는 율법 종교를 비판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고”(막 7:1~2) 예수께 질책성의 질문을 하였다. 마가는 이러한 장면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 복음서 저자 마태도 비슷한 보도를 한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2).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예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4-5). 예수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럴듯한 종교적 근거를 들어서 부모공경을 소홀히 하는 당시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신 것이다. 마가는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 7:9-13).
예수는 바리새인의 위선과 사리사욕을 나무라신다. 수만명이 모인 처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전통과 율법 자체를 거부하거나 해체시키는 해체주의자는 아니었다.
불을 던지러 오신 분
예수는 사랑의 계명을 주신 분이면서도 동시에 불을 던지심으로써 율법과 제도에 안주하려는 사회 구성원에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불이란 구약성경의 그림언어에서 종말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수단이다. 불이란 하나님 말씀의 심판하시는 힘에 대한 상징으로도 기능한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에서 불은 타오른다. 불은 인간의 불의와 오만을 심판하며 정결케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화평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여기서 분쟁이란 적대적 분쟁이나 증오의 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분쟁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한 거룩한 분쟁이다. 이것은 아비와 아들, 어미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거룩한 갈등이나 불순종이다. 이것은 아비와 어미, 시어머니와 며느리, 장인과 사위 사이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때 야기하는 거룩한 분쟁이나 불순종을 말한다.
자기 정체성을 지니신 분
예수는 “나는… 이다”(나는 길이요, 진리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산 떡이다. 등)라는 독특한 어법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교하신다. 그리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어법은 모세에게서 찾아 볼 수 없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어법이다.
심지어 예수는 결정적인 선언을 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까지 한다. 이들의 눈에 나사렛 예수는 당시 유대의 율법과 유전을 거슬리는 신성모독자요 무법자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 요한에 의하면 당시의 정황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3).
예수는 누구의 스타일과도 부합하지 않으신 분이다. 그는 1세기나 그 이후로 현재까지 어떤 사람의 판에 박힌 삶과도 들어맞지 않으셨다. 예수는 당시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열심당파, 헤롯파 등의 고정적인 종파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서 기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예수와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가장 개방적인 인물
예수는 역사 속에서 가장 영속적인 인물이다. 그는 가장 자유롭게 사신 분이다. 나사렛 예수는 제도나 종교의 틀에 매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시면서 가장 개방적으로 사셨다. 예수는 자신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가장 자유롭게 사셨지만 무법자처럼 살지 아니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모든 법의 법인 사랑의 지고한 법에 따라 사셨다.
예수는 품행에 문제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근히 나아가 말을 거시셨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그 시대의 관습으로 볼 때는 유대인 남자가, 특히 랍비가 여인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요 4:27). 예수는 삶의 의미와 생수에 대한 갈증을 지닌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신다. 예수는 남편 다섯을 가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고백을 이끌어내시고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하신다.
자기 헌신적인 존재
예수는 병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사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예수가 받을 세례란 죽음의 세례이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죽음의 세례를 말한다. 예수는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구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이들에게 영광에는 먼저 고통과 헌신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끌려 가실 때 자기를 따르는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자손을 위하여 울라”(눅 23:28).
철저히 이웃을 위하여 사신 분
예수는 소외되고 그늘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의 전 삶을 드리셨다. 그는 철저히 이웃, 특히 타자를 위하여 사신 분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눅 10:30-37)는 곧 나사렛 예수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주신 비유이기도 하다. 어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레위인, 제사장도 보고 지나갔으나 어느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주막에 데려다 기름을 발라주고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그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주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인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팔아 먹은 자들로 여겨 멸시하고 상종하지 아니하였다. 예수 자신은 유대사회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자그만 시골 동리에서 온 낫선 이방인처럼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사마리아인처럼 당시 유대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고아, 과부의 편에 셨던 것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당시 종교 권력자로부터는 소외된 예수 자신을 지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탁월하신 존재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예수는 자신이 이것을 이루는 메시아인 것을 알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예수는 인간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한 후에 유대인들이 “네가 무슨 표적을 보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요 2:19). 당시 유대인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 요한은 해석해준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고 말씀하신다.
빌립은 예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는 이 요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분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기록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1세기 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는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분은 오늘도 선포되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현재하시는 분이시다. 포스트모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분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전통과 인습을 개혁하고 그 전통이 가진 아름다운 정신과 보고(寶庫)를 살아나게 하시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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