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가 가르치신 계명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것은 율법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예수의 새 계명은 모세 율법에 대한 창조적 수정(修訂)이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었다. 모세가 준 율법은 무효화되지 않고 예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 안에서 완성된다. 사랑의 계명 안에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을 폐기하지 않았다. 2세기 초대교회 안에서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이단(異端)이 일어나 구약 성경을 폐기하고자 했을 때 공(公)교회 회의는 144년에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신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 오늘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과 신약을 경전(經典)으로 받아 들이고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다.
예수가 선포한 윤리의 새 형식
예수는 구약 율법의 요구를 행위자의 내적 동기에 적용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들을 동기(動機)의 측면에서 극단화한다. 예수는 구약 율법의 요구를 그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재정형(再定型)함으로써 율법 해석에 신선함과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예수 교훈의 새로운 형식은 “…라고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다. 예수는 사람이 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만 삶에 대한 확실한 기초를 놓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적 교훈의 새 형식은 모세의 권위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나 서기관 등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의 견지에서는 자기들의 전통 규례(規例)와 유전(遺傳)에 도전하는 종교적 위법행위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를 위험인물로 보았고,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 교훈의 새로운 형식은 그 자신이 지니신 메시아적 권위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나사렛 예수의 윤리적 새 형식의 선언은 유대교의 전통이나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예수만의 독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모세의 율법 시대와 선지자의 예언 시대가 가고 하나님 은혜의 복음 시대가 온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당시 유대교 랍비 전통의 해석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전통 규례는 구전(口傳)에 의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면서 계명이 주어진 본래 의도가 애매모호해지거나 왜곡되었다. 이것들은 장로들이 인위적으로 세운 유전(遺傳)과 규례였다. 그래서 예수는 랍비들의 전통 규례를 무시하였다. 예수는 계명의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 장로들의 전통에 반(反)하여 계명의 본래 의도로 되돌아갔다. 장로들의 전통은 고대 성문법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예컨대,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면 무엇이 일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적용과 해석은 누적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법문서(a law-code)가 되어 버렸다. 구전(口傳)법은 문서(文書)법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랍비의 법체계는 너무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쳤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계명이란 그 본래적인 목적이 충족될 때 계명은 바르게 지켜진다고 가르쳤다.
계명의 본래적 의도를 역동화
십계명의 네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라면, 예수는 안식일이 제정된 본래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율법이 제정된 목적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 동물, 그리고 땅의 휴식, 재충전과 구제를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는 일이나 행동은 안식일에 시행되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고려에 의하여 예수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셨다. 이 일에 있어서 예수를 비판한 자들도 사람이나 가축이 위급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안식일에도 적합한 의료적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쉽사리 하루나 이틀을 기다릴 수 있는 자들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때문에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등이 굽은 여인을 치유한 일에 대하여 분을 품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 13:14). 이에 대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질책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13:15-16). 예수에 의하면 안식일이란 병을 고치기에 적합한 날이다. 병 고치는 일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조자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병 고치는 행위, 도랑에 빠진 가축을 끌어내는 일은 안식일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영예롭게 하며 동시에 창조자를 명예롭게 한다.
여성의 보호
동일한 윤리의 원칙은 이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어떤 수치되는 일(불륜, 불효 등)을 발견하였을 경우(신 24:1)에는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랍비 학파는 수치되는 일의 성격에 대하여는 불일치하였다. 어떤 자는 좁게, 어떤 자는 넓게 해석하였다. 예수는 “아내를 버리는 일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 주기를 요청받았을 때 예수는 이혼을 반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신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5-9). 이 일을 판단함에 있어서 예수는 율법주의자나 반(反)율법주의자도 아니었다. 예수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리는 일에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의 말씀은 여성의 처지를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유대 법에 있어서 이혼의 우선권은 남자에게 있었다. 유대 가정의 저울은 아내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었다. 예수의 이혼 반대는 이러한 유대 사회의 불균등을 개선하려는 효과를 지녔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보다 높은 삶의 윤리를 요구하셨다.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의 바른 사람의 일반적인 도덕성보다 더 많은 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義)보다 높은 의를 요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들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의 사람들보다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예수는 요구하셨다.
율법의 폐기 아닌 완전화
예수는 모세가 준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는 율법 폐기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율법의 정신인 인자와 의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눅 6:32-34).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사랑의 지고법의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된 표징은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 희생이다. 나의 이익 보다는 이웃과 친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윤리를 가지는 것이다.
무한히 용서하라
복음서 저자 마태는 예수가 말씀하신 용서의 분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질문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신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일곱 번 용서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용서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생각할 수 있는 용서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신다. 이것은 한계 없는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는 자기의 빚은 탕감받았으나 자기에게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하지 않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마 18:23). 결산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는 데, 갚을 것이 없다.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한다(마 18:24-25). 그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간청한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마 18:26).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마 18:27).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말한다: “빚을 갚으라” (마 18:28).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여 간청한다: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마 18:29). 그러나 종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둔다(마 18:30).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린다(마 18:3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2-33).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긴다(마 18:34).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약 5천 데나리온이다. 종과 종의 동료의 빚 분량의 차이는 5천만 대 100이라는 엄청난 것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형제의 허물에 대한 용서는 일곱 번이라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번이라는 무한대에 이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예수가 가르치시는 용서는 무한한 용서다. 이것은 조건부의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윤리이다. 인간적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윤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 불가능은 가능해 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윤리다. 이 무한한 용서의 사랑이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 실천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의 위대성이요, 이 사랑은 그가 십자가 죽음으로 실천하신 그의 유일성이요 독특성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