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충실한 아들로 성장하였고, 유대교적 가정의 이상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홀로 가계를 꾸리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면서 효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예수는 가정을 떠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에 충실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예수는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혼인잔치 도중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에게 알린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이 말에서 “내 때”란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때요 동시에 예수가 영화롭게 되는 때이다. 이 때는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때이다. 그러나 이 때는 그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을 통하여 이미 지금 현재적 사건이 된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
예수는 가정을 신성하게 보았다. 예수는 가정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구약 창세기를 인용하신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결혼은 창조주의 섭리이며, 한 몸이 되는 신비이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창조주의 섭리가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그에게 반려자로서 하와를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하나님은 장성한 남자와 여자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둘이 하나의 몸을 이룰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것이 가정의 신비이다. 예수는 이러한 창세기에 나타난 가정의 신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의도를 설명하시면서 본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 그리고 음행한 사유없는 이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 음행의 경우 음행한 자가 이미 한 몸이 된 결혼의 신성함을 훼손하고 깨뜨렸기 때문에 예수는 음행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하신 것이다.
가정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신 16:11).
누가가 그의 복음서(눅15장)에서 기록한 ‘돌아온 탕자(蕩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이야기’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가정에 관한(눅15:11) 설교이다. 이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인류 역사상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받아서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탕진(蕩盡)한 후에 흉년이 들어 궁핍한 나머지 돼지지기로 들어간다. 둘째 아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스스로 돌이켜 이른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타국에서 멸시 받고 굶주리는 고생을 한 탕자는 겸허해져 이제 자신을 아버지의 품군 하나로 생각하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 놓고 오늘도 아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생각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눅 15:20).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런데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른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그리하여 온 가족들이 잔치를 열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맏아들인 형은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형은 노하여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나, 아버지는 나와서 맏아들에게 그 이유를 알린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인간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탕자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설명하고 계신다.
가정은 신성한 창조 질서
예수는 장남으로서 남동생 넷과 여동생 둘을 가졌다. 동네 사람들은 공생애에서 복음 전파를 하고 있는 예수를 보고 말한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 13:55-56). 우리는 복음서 저자 마태가 기록한 이 장면에서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나사렛에서 살았고, 그 육신의 형제 자매들과 같이 생활하였다는 역사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정생활을 유지하는 지침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혼은 남편 쪽에서만 제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예수는 원칙적으로 한 번 맺어진 혼인관계는 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 10:9). 예수는 그 이유를 결혼에 나타난 결합원리로 선언하신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막 10:6-8).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악(惡)함 때문에 허용했던 이혼을 예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가정이라는 더 높은 가치에 비추어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하신 것이다(막10:1-12).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창조의 질서로서 인위적으로 깨어질 수 없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인정: 모세의 권위를 능가
가부장(家父長) 사회인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권리와 경제권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이 임의로 자기 아내를 버리곤 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악습에 대하여 예수는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를 내 쫓을 권리가 없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는 여성을 천시하는 유대인 사회의 관념을 깨뜨리고 계신다.
유대인 남자들은 내어 버린 아내에 대하여 이혼증서를 주는 것으로 사회적 책임을 모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 나아와 시험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다 (막 10:4). 그러나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신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막 10:5). 예수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막 10:11-12). 예수는 여기서 모세의 이혼 규정을 넘어서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려서는 않된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다른 여인에게 장가드는 자나 이혼당한 여인에게 장가드는 자는 모두 간음한 자라고 예수는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에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역사적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가 있다.
어린이를 칭찬하고 존중하셨다
파피루스(예수 당시 이집트 지방 문서를 거룩한 갈잎으로 만든 일종의 종이)에 적혀 있는 기록은 1세기 경에 있었던 남아(男兒)선호 사상을 알려주고 있다. 최근 발굴로 나타난 어느 파피루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가정생활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적여 있다: “우리는 지금 알렉산드리아에 있소. 당신이 애들을 잘 돌보기를 바라오. 나는 보수를 받는 대로 당신에게 그것을 보내겠오. 만일 그 애기가 사내거든 잘 기르고, 계집 아이거든 내어 버리시오.” (James Stewart, 예수의 생애와 교훈, 김정준역, 대한 기독교서회, 1979, 185 재인용)
1세기 경 유대인 사회에는 어른 우위 및 남아 선호(選好) 사상이 지배했다. 이런 시대 배경에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는”(막 10:13) 장면이 이해될 수 있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꾸짖는 제자들에 대하여 노하시고 이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신다”(막 10:16).
복음서 저자 마태도 어린이를 사랑하는 예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3). 예수는 어린이들의 천진만난함을 좋아하셨고 이들의 순수한 신앙을 칭찬하셨고,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어린이 존중에 있어서도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당시 시대 사상을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 우선
예수는 가정을 신성시 하면서도 가정을 하나님 나라에 비하여는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가정생활에서 나와서 복음전파에 모든 것을 바쳤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하는 예수의 말씀을 전해준다. 복음 사역을 하고 계시는 예수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마12:47)고 말을 건낸다. 예수는 그에게 다음같이 대답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어머니요 동생”이라고 칭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49-50).
예수는 복음으로 인하여 가족 관계에 갈등과 불화가 생길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이러한 불화와 갈등은 재산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 사람의 뜻을 따르는 것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불화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도 장례를 당한 제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제자는 말한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 9:61). 예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우선을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예수는 여기서 부친의 장례를 치룰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장례는 남은 가족들에게 맡겨두고 먼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선을 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치열한 영적 전투 속에서 죽은 자에 대한 작별인사는 허용되지 않는다. 예수는 따름의 긴급성. 말하자면 제자직의 극단성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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