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배경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펼쳐지는 드라마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어떤 부분도 없다. 역사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역사의 의미는 구속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실 때에 모든 여건을 조성해 놓으시고 그 가운데서 그 의 일을 진행하신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저술한 『복음서』 및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 등은 나사렛 예수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대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베들레헴과 헤롯왕, 인구조사
역사적 인물로서 나사렛 예수의 탄생 시기와 장소는 분명하다. 탄생 시기는 유대의 헤롯왕 치하이고, 탄생지는 유대의 베들레헴이다.
복음서 기자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본봉왕 헤롯의 통치하에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2:1), 그러나 예수가 성장한 곳은 유대 북부 갈릴리 지역의 남단 마을인 나사렛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베들레헴에서의 예수의 탄생을 구약의 예언과 연결시키고 있다. 구약의 예언은 천년 전 이새의 아들 다윗이 오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막 5:2). 누가는 예수 탄생시 각 세대 부양자가 그의 가족이 유래한 고향에서 호적(戶籍)하도록 하는 인구조사(census)가 시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당시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는데, 출생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기 위하여 가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를 동반한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첫 아기 예수를 낳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가 헤롯왕 통치의 시대(눅 1:5)에 태어났으며 예수보다는 6개월 먼저 잉태된 세례자 요한의 임신과 출생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헤롯왕은 주전 37년에서 주전 4년까지 유대왕으로 다스렸다. 누가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 제15년, 즉 주후 27-28년에 예수는 30살 정도 되었고 복음전도 사역을 시작하였다(눅 3:1, 23)고 기록하고 있다.
마카비 형제 반란과 하스모니아 왕조
유대 왕국은 다윗 왕에 의하여 창건되어 400년간 지속하다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초대왕 고레스(Cyrus)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종교적 관용정책을 펴서 유대민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성전을 짓도록 허용한다. 유대지역은 페르시아가 400년간 통치한다. 그 뒤 유대지역은 희랍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에 의하여 지배된다. 알렉산더의 후계자 중의 하나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는 유대교를 희랍의 종교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종교적인 박해 정책을 쓴다. 주전 167-164년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랍신들에게 제사들 드리도록한다. 유대인은 이방신 제사를 멸망의 가증한 짓으로 간주한다. 존 마카비(John Maccabaeus)와 그의 형제들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희랍의 통치세력에 맞선다. 마카비 반란자들은 주전 164년에는 종교적 자유를 얻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다. 그리하여 주전 142년에는 마카비 형제의 마지막 후계자인 시몬(Simon)은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를 건설한다. 그리하여 주전 142에서 주전 63년까지 79년간 하스모니아 왕조는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유지한다.
에센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서기관
이러한 무력항쟁의 시기에 유대인의 경건한 자들 사이에 두 가지 분파가 형성된다. 하나는 에센파(the Essenes)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파(Pharisees)와 사두개파(the Sadducees)이다. 에센파는 공공생활에서 퇴각하여 쿰란(Qumran)이라는 유대 황무지에 정착하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공공생활에서 퇴각하지 않고, 하스모니아 왕국에 대한 우선적인 반대자로 서게 된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귀족계급으로서 하스모니아 왕조의 협력자가 된다. 주전 63년 로마의 군대에 멸망할 때까지 마카비 형제가 이끈 하스모니아 왕조는 근 80년간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 예수는 사두개인들과는 드물게 만났지마는 바리새인들과는 자주 충돌한다. 예수는 장로의 유전(tradition of the elders))에 관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인다.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 가운데는 서기관들(scribes)이 있었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학교에서 공부한 자들이나 모두가 율법을 준수하는 자가 아니라 조상의 유전을 무시하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는 갈릴리 지방 나사렛 동네에서 네 형제와 몇 자매들과 유년 시절을 보내었다.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예수가 공생애에 들어갔을 때, 이미 별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대에는 산헤드린(Sanhedrin)이라는 최고 종교의결기구가 있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과 70인의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장로의 다수가 사두개인이었고, 바리새인은 소수였다. 산헤드린은 내치에 있어서 최고의결의 기구였다. 산헤드린은 당시 율법을 모독하고 신성모독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의결한다.
대제사장 가이바, 유대왕 헤롯
예수의 선교사역 동안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가이바(Caiphas)라고 이름하는 요셉이었다. 그는 주후 18년 유대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하여 임명되었고, 18년 동안 봉직하였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주후 26년 유대 후임 총독이 되었을 때 빌라도는 가이바를 대제사장에 그대로 둔다. 가이바는 신약시대에 있어서 대제사장 가문 중 가장 능력있는 일원이었다. 그는 주후 6년-15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Annas)의 사위였다. 안나가 직책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여러 해 동안 대제사장 직책 배후의 실력자로 머물렀다. 그래서 그는 다섯 아들과 손자를 주후 16-68년 사이 다양한 시기에 대제사장직을 갖도록 하였다. 예수는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과 로마총독을 만나기에 이른다. 대제사장 가이바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종교적으로 결정하는 자가 된다.
예수가 복음사역을 하던 시기에 통치한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헤롯 왕은 교활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그를 여우(fox)라고 불렀다(눅 13:35).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는 불륜을 행한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옳지 않다고 책망한다. 정의로운 지적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목베임을 당한다(막 6:17-29).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히는 시기에 예수는 복음선포의 사역을 시작한다.
민란의 지역 갈릴리
헤롯왕은 나사렛 서북쪽에 위치한 세포리스(Sepphoris)에 궁전을 짓고 주후 22년까지 거기서 집정을 하다가 게네사렛 호반에 위치한 디베랴(Tiberias)에 새 궁전을 짓고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 도시의 이름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서 부친 것이다. 헤롯이 죽자마자 민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유다(Judas)라 이름하는 자가 세포리스에 있는 궁전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로마 총독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평정하였다. 로마의 평화란 2천명에 이르는 민란 지도자들에 대한 십자가형으로 시행되었다. 그들의 시체는 중앙로에 다른 반란자에 대한 억제책으로 오래동안 전시되었다(Jewish Wars, 2.55-75).
9년 후 아켈라우스 조서(deposition of Archelaus)에 따라서 남쪽 유대가 로마의 한 주(州)로 편입되었을 때, 이에 반대하는 다른 유다(Judas)에 의한 새로운 민란이 일어났다(Jewish Antiquities, 18.1-10).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반란의 정신은 요세푸스가 “제4의 철학”(fourth philosophy)이라고 부른 것으로 지속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거주하면서 이방의 지배자에게 조공의 방식으로 땅의 소산을 넘기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교리이다. 유대가 로마 황제의 속주(屬州)가 되었으므로 이제부터 거주민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리아의 총독 구레네(Quirinius)는 로마 제국의 재정을 위하여 유대에 할당된 세금의 양을 정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탄생한 때가 바로 이 때이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
예수가 성장한 나사렛은 지리적으로는 침체한 벽지마을이었으나 정치적인 시대적 흐름에서 격리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민란의 소식이 들려오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로마로부터의 민족 해방 영원이 유대 민중의 가슴 속에 불타올랐다. 민족 해방이란 하나님의 간섭으로든지 아니면 무장봉기를 통하여서든지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유대인들은 민족 해방이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에 의하여 실현될 것으로 믿었다. 메시아 대망이 유대인들 가운데 퍼지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다가오는 메시아 예수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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