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시절 예수는 공생애의 준비기간으로 자신을 준비하였다. 예수는 본류 예루살렘으로부터 변방(邊方) 지경이요, 소외 지방인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었다. 그러면서 예수는 목수로서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부양했으며, 직업에 충실했으며,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사를 공부하였다. 요한은 성육신 신앙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9-12)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마을에서 성장
예수 부모는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에 피신하여 있었다(마 2:15). 헤롯이 죽은 후에야 예수 가족은 약속된 거룩한 땅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예수 부모는 이스라엘의 심장부인 유대 지방이나 그의 본래 출생지인 베들레헴에서 거처를 정할 수 없었다. 예수 가족은 변방 지역인 이방의 땅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들어와서 살았다(마 2:22-23). 메시아 예수는 자기 땅에서도 그리고 자기 백성 가운데서도 언제나 낯선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갈릴리의 나사렛은 아주 미미한 곳이었다.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에서도 당시의 유대교 문서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곳이다. 마태는 이것도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한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이 미미한 마을 나사렛이라는 거주지 자체가 예수의 메시아 비밀에 속한다.
12살 된 소년 예수
복음서는 12살 된 소년 예수의 일화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소년 예수는 유대 가정의 다른 어린이들처럼 부모와 같이 예루살렘의 성전 축하식에 참석하였다(눅 2:42하). 축하식 도중에 부모들은 아들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소년 예수는 축하식이 끝난 다음 성전에서 발견되었다. 예수는 그의 부모에게 말한다: “왜 나를 찾으셨나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였나요?”(눅 2:49). 복음서 기자 누가는 소년 예수의 최초의 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말은 소년 예수의 약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J. Steward, Life and Teaching of Jesus, 김정준 역, 40). 당시 예수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의 뜻을 알지못했다. 그러나 이 말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삶, 외롭게 살아가야 할 전조를 예시하고 있다(눅 4:23하, 요 6:66, 요 7:5).
소년 예수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은 그의 독특한 메시아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종교인들, 대제사장까지도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 소년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친밀한 내면적 관계를 나타내준다.
12살에서 30살까지 나머지 18년간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복음서는 우리들에게 침묵하고 있다. 영지주의적 문서들에 의하면 예수는 인도의 부다가야까지 와서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는 신화다』의 책처럼 예수를 영지주의의 현인(賢人)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예수상은 예수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모습과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은 30세에 이르는 소년기 및 청년기 예수의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조명하고 있다. 이들은 소년기의 예수의 삶은 외경이나 영지주의 문서에 근거하지 않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에 의존하여 추론하고 있다.
성실한 장남으로 생계를 부양
청소년 예수는 대가족을 이룬 가정에서 자라났다(마 13:55하, 막 6:3). 예수는 부친 요셉으로부터 목수의 일을 배웠다. 그래서 예수는 농기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행한 설교의 비유에서 추정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와서 나의 멍에를 지라.” 사람들은 예수를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 13:55)라고 조롱하였다. 아버지 요셉은 복음서에서도 별로 언급이 되지 아니하므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예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장남으로 목수로서 가계를 짊어지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였을 것이다. 예수가 가정사를돌보았다는 것은 예수의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잃어버린 동전 한 푼을 찾기 위하여 온 집안을 쓸고 찾아 나서는 이야기”(눅 15:8하), “밀가루와 누룩의 이야기”(마 13:33), “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이웃 집 사람을 깨워서 떡을 빌려온 이야기”(눅 11:5하), “등경 위에 둔 등불 이야기”(마 7:9하) 등은 마리아 가정에서 일어난 넉넉하지 못한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청소년 예수는 넉넉지 못한 가정에 충실했으며 가정을 신성한 처소로 만들었다.
목수로서 노동을 신성시
청년 예수의 직업은 나사렛의 목수였다(막 6:3). 예수는 목수인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웠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청년기의 대부분을 농가구를 만드는 데 보내었다. 예수는 소들이 지는 멍에와 농기구와 가구를 만들었다. 예수는 농구와 가구를 만드는 일을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었다. 청년 예수에게 노동은 신성한 일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집 문 밖에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짐은 가볍다”(마 11:30)라는 글귀가 박힌 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사렛 예수가 만든 멍에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쓰기에 가볍고 편안하며 꼭 맞았을 것이다.
구약 성경을 읽으심, 율법 공부
청소년 예수는 유대가정의 풍습에 따라 구약성경을 읽었다. 구약성경은 유대교육의 중추이었다. 그러므로 청소년기 예수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서들을 읽으면서 자라났을 것이다. 성인이 되기까지 구약성경을 읽는 것이 그의 일과였을 것이다.
그의 성경지식은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나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 나가서 시험을 받을 때 구약성경 말씀으로써 그 시험을 이긴다(마 4:4,7, 10). 예수는 자기의 복음 사역을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거룩한 영의 기름부으심이 오늘날 이루어졌다고 성경을 해석하신다(사 61:1, 눅 4:17하). 예수는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자신을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였고 자기의 메시아 사명을 성취하고자 하였다(사 53장).
자연을 사랑하시고 인간사를 아심
청소년기 예수는 다가오는 공생애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농촌 마을 나사렛에서 충실히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살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예수의 모습은 그의 아름다운 가르침: “들의 꽃”(마 6:23히). “추수의 비유”(요 4:35), “자라나는 씨”(막 4:28), “공중의 새”(마 8:20),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눅 15:3-6) 등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어느 시인보다도 자연을 사랑하던 청소년이었다. 우리는 농촌인 나사렛에서 성장한 청소년 예수에게서 자연에 대한 경이와 도취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청소년 예수는 자연을 철학적으로 명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로 보았고 창조물인 자연속에서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는 창조주의 섭리, 밤중에 놀랍게 자라는 씨, 공중의 새를 돌보심, 99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체험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는 사회 속에서 인간성을 배웠다, 그것은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다: “장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 광경”(마 11:16하), “한 재판관에게 가서 애원하는 과부의 광경”(마 18:1하), “농촌 청년이 도시에 나가 방탕하다 돌아오는 이야기”(눅 15:11하),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는 외식적인 종교가들의 모습”(마 6:5) 등이 그가 인간성을 배운 구체적인 삶의 예들이었다. 청소년 예수는 장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재판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을 보고, 방탕한 청년이 귀가한 사실을 체험하고, 당시 종교인들의 외식적인 종교 행태를 봄으로써 인간들이 마음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배웠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소통하시는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사렛 농촌 마을에서 보낸 18년간 침묵이란 나사렛 예수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성을 진솔하게 터득하는 수련의 기간이었다.
이에 관하여 복음서 기자 요한은 다음같이 보고한다: “예수께서 인간들을 다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것 까지도 일일이 아시므로 인간에 대한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았다”(요 2:24-25).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인간 삶의 아주 구체적인 모습을 실제로 이해하고 고통과 어려움과 인간사정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한다. 요한은 신앙의 눈으로 이 역사적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놀라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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