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2010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중간 단계 [마크 듀퐁]

하나님의 친구로 불렸던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 특징을 찾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가지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주의 임재 안에 거할 있는 능력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세번째 특징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동안 기도에 관한 많은 책에서 조차 성경 인물들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했던 방법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메시지의 초점 자체가 빗나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친구끼리 진솔한 감정을 나눌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사실상 우리 현실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헌신적인 관계란 거의 찾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갈급함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만 채울 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흘러넘치게 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이기심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을 섬길 있게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 내어드릴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의인들 역시 악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시련을 겪게 것이라는 경고가 성경에 가득합니다. 시편 3419절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제자들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속에서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운데 분명 고통과 갈등이 존재할 것이지만 하나님과 아픔을 함께하면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우리가 속에서 느끼는 고통이 결코 우리 심령 깊은 곳의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빼앗을 없도록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향해 퍼붓는 비난 중의 가지는 그들이 겉모습만 번듯하게 꾸며 놓은 조형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런 식의 비난들이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닥쳐오면 그들의 얕았던 신앙심의 깊이가 탄로 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구절을 줄줄 암송하거나, 걸핏하면 성경구절을 인용하기 좋아하는 명목상 신자들의 영적 실체가 탄로 나는 순간 역시 바로 그들이 시련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것이 나쁘거나 하찮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은 지속적으로 성경말씀을 먹이고 이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통달하게 될지라도 성경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경험이 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게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고난과 역경의 바람이 불어 제대로 있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진리와 원리원칙 이상의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분과의 진실한 관계를 맺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자 구원자요 연인이면서 최고의 친구하고 고백할 있는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에 이르지 못할 우리에게 불어오는 삶의 폭풍우와 맞서 절대로 승리할 없습니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련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과의 친밀함의 실제적인 영역속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친구로 부르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1 2절에서 사도 야고보는 내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쁠 대나 슬플 때나 항상 기쁜 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때가 있으며라는 솔로몬의 고백은 거짓이 되고 말것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기쁨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기쁨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기쁨은 흔히 성공이나 번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기쁨의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열에 채우기 원하시는 기쁨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그분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보호하심 중에 있을 아니라 핍박과 환란 중에 있을지라도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낼 없는 힘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3).

우리가 슬픔과 억눌림과 고난의 시기에 처했을 , 상황을 이겨낼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이러한 말씀의 기초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초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본적인 말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수준이 도달하기까지 영광과 영광 사이에 우리가 거쳐야 중간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친구인 조셉 갈링톤(Joseph Garlington)주교는 시편 84편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특별히 6-7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곳에 많은 셈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그는 특별히 힘을 얻고 얻어(from strength to strength)’ 라는 대목에서 얻어다시 말하면 더욱더 강함으로(to strength)’에서  으로 발음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능력에서 능력으로 샘에서 샘으로 나아가면서 성장을 경험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영적 성장과 성장의 중간 과도기적 시기는 우리가 영적으로 메마르고 연약함에 처한 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더욱더 신뢰하고 의지할 있도록 우리가 겪고 있는 영적 메마름과 연약함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스스로 얼마나 메마르다고 느끼고 있든지 혹은 깊은 좌절감이나 공허함 가운데 있든지 우리에게 영적 돌파가 일어나기 전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통 중에도 분명 평화가 있습니다. 아픔 중에도 분명 기쁨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기쁨이 단지 희망 사항일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과 별반 다를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사항이 실재가 되는 하나님 나라가 현실로 존재한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조차 , 무언가 우리와는 다른걸하면서 주님께 관심을 보이게 것입니다.
                                                                                     

비록 어려운 시기 가운데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 그리고 그분과의 친밀감으로 넘칠 ,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기쁨을 누구도 빼앗아 없습니다. 비록 얼굴에는 슬픔의 눈물이 흐를지라도 압제를 당하는 자의 피난처이며 환난 때의 요새가 되시는 반석과도 같은 강한 힘이 우리 심령 안에 존재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사방을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사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리라.”(고린도후서 4:8-10)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하고도 압도하는 기쁨은 오직 우리가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에만 발견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면, 단지 그분의 부르심을 이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깨닫게 되어 결국 우리는 실제적인 믿음 가질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의 성품을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하나님과 대화할 있는 자신감을 자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없는 편안함이나 친숙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 16절에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디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자유함으로 인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아니라, 상한 자나 병든 자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있습니다. 헤이포드(Jack Heyford)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불가능한 영역을 침노하는 혹은 역사를 바꾸는 중보기도자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과친구되기/마크 듀퐁/큰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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