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주님의 임재가 실제적으로 임했던 장소에서 하나님께 두 가지 중요한 요청을 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 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주님을 알아왔지만 한결 같은 겸손함과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전심으로 달려가라는 메시지를 너무 자주 들을 수 있다 보니, 성도들이 그토록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식상하게 여기거나 자칫 안일하게 반응하기 쉽습니다.
‘글쎄요, 저는 구원 받았어요! 저는 하나님을 알아요. 저의 삶은 하나님께 이미 축복 받고 있는 걸요! 왜 제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나요?’라는 식의 반응을 우리는 자주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던 한 교구 목사님의 일화가 떠 오릅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주일 설교시간에 주님에 대한 큰 갈망과 목마름을 가지라고 온 힘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은 한 성도가 ‘목사님, 저는 구원 받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 제자 왜 하나님을 더 추구해야만 하나요?’ 라고 반응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잠시 동안 그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난 후, ‘글쎄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모든 것을 이미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것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사실 성령 충만함의 정도는 성도들 개인마다 매우 다양합니다. 사막의 열기 때문에 탈수증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한 잔의 물조차도 마치 오아시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죽을 만큼 힘든 고난과 역경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만지심을 ‘단 한번만 이라고!’ 체험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과 이로 인한 성령충만에 대해서 실제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갈망은 이보다 훨씬 더 기준이 높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심령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와 강물처럼 흐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일례로 몇몇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은 방언 받은 것을 증거로 이미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로에게는 성령 충만이 너무 강하게 임하여 베드로의 그림자만 사람들에게 드리워져도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치유한 것은 베드로의 그림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치유한 것은 바로 베드로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권능의 날개를 드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물을 조금 가져 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할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창세기 18:4-5)
아브라함은 주님께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왜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갈망은 주님께서 가시던 길에서 돌아서서 그들 부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얻고자 하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님과의 시간을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복음주의 교회에는 ‘예수님을 단지 구세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과 ‘구세주뿐 아니라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들 간의 논쟁이 끊임없이 있어왔습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일단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하기만 하면 자신이 구원받아 천국가는 길은 이미 보장이 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저를 포함한 다른 쪽에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며 따르는 제자의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단지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들 삶의 전 영역에서 주인 곧 왕이 되어야 하고, 비로서 그렇게 될 때에만 그가 진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통하여 단지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구로서 동행하는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기초가 되는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구세주 뿐 아니라 주인으로 영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은 단지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일회적인 ‘가격표’라기 보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영글어 가는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첫사랑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특별히 다친 자, 마음이 상한 자,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장을 소유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다른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숙의 단계인 두 번째 단계는 다른 영혼의 삶에 뛰어 들어 그들을 섬기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완성의 단계인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우릴 위해 행하신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성숙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으로 더 많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데 이것은 귀한 것이며 또한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기름부음을 받고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교회성장과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보다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성도들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성도들이 아브라함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들이 가능해진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은사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친구되기/마크 듀퐁/큰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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