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리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그가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 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 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18:1-5)
흔히 ‘믿음의 조상’으로 잘 알려진 아브라함에게 제가 가장 주목하는 점은 매일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교제하기 원했던 그의 갈망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언제나처럼 그의 장막 안에 앉아 안식을 취하며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쁠수록 좋다’라고 주장하는 현대교회의 위험스런 사고방식이 낳은 부작용은 인격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귀한 교제를 위해 쏟을 시간이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순간적 만족을 원하는 ‘빨리빨리’의 시대에 물들어, 마치 전자레인지 해동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식의 부활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하듯 속성으로 끝나는 예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소경이 되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법을 대부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머리의 지식으로 실제적인 영적체험을 대신해 버리고, 실질적인 신앙생활을 혼적인 가르침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많은 교회들이 조금함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일은 인터넷 검색 등을 이용하여 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누군가에 대해서 아는 일과 그 사람의 친구가 되는 일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밀한 계획과 그분 마음속 깊은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친구들 뿐인 것입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과 친구 되기 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구는 하나님과 산책하는 것처럼 친밀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강력한 예언적 기름 부으심을 가졌던 분 중의 하나로 알려진 사무엘 선지자와 계시의 사람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무엘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궤가 모셔져 있던 여호와의 전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는 깊은 계시의 영역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런 깊은 수준의 친밀함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머무르며 교제하는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계획의 한 부분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쉬고 있을 때 종종 예수님의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곤 했습니다. 사실 남자 성도들이 이렇게 예수님과 친밀함을 나누는 장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 12명의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가장 깊은 수준의 계시를 경험한 제자는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나누는 친밀한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계시록을 통해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종종 예수님께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사도 요한에게 물었던 사실 역시 그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게시판을 보거나 공지사항에 귀 기울이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원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산책하는 것처럼 주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장막 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보았고’ 주님이 세 명의 사람 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존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조급함이라는 그물에 걸려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눈앞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지 못한 채 다른 곳만을 바라보느라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닥친 일에만 집착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성향이 있습니다. ‘만일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어떤 중요한 것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전에는 결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한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번도 미리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의 눈으로 그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여러 번이나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선을 하늘에 있는 별을 향해 고정시키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떠나 이 세상의 환경을 초월한 영역을 바라보기를 주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발명을 위한 과정에 대하여, ‘상상력은 지식 이상으로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으며, ‘문제가 발생했던 그 당시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우리가 현재에서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영적인 돌파가 일어나길 갈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귀로 듣고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일을 하고 지금까지 바라보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일중독자가 될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삶을 모델로 한 삶을 살기 원하다면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성을 뛰어넘는 생각이란 바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상상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혼적인 상상력과 영적인 상상력의 결정적인 차이는, 혼적인 상상력은 자연적 영역에서 그저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것인데 반해, 영적인 상상력은 성령에 의해 그 일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했던 나바(naba)와 지드(zyi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바(naba)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지드(zyid)라는 단어는 ‘거짓 선지자’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일들을 꾸며낸다.’는 뜻입니다. 나바 선지자들은 그들의 영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받지만 지드 선지자들은 그들의 혼적인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들을 단지 입밖으로 내뱉을 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장의 도화지를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혼의 도화지를 나타내며 두 번째는 성령의 도화지입니다. 스케치를 한다든지, 시를 쓴다든지, 또는 저녁식사 메뉴와 같이 현실적인 것을 만들어 낼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이라는 재능을 사용합니다. 다른 재능들과 마찬가지로 상상력이라는 재능 역시 선과 악의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응할 만한 도화지 즉, 영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서 밝혔듯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와 계시의 영’에 의해서만 기름부음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혼적인 재능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 심령안에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서구 교회들이 ‘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경계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이 일차원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영(spirit)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하나님이 부리는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나타내기도 하고, 다른 영역에 있는 악한 영(demonic spirit)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영은 ‘이성을 초월하여 이해하고 의사소통 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앞으로 올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구약의 엘리야가 직접 다시 온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을 받아 사역했던 것처럼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을 가진 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 살았던 세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 살았던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비교적 신학과 교리에 관한 지식이 해박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식면에서 그들은 거의 영적인 파산지경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고 설교하고 명목상의 제자 훈련을 할 시간은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을 기다릴 시간’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쉼을 얻어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열렬히 추구하며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과친구되기/마크 듀퐁/큰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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