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이맘때쯤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은 사라에게 있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나이를 훌쩍 넘긴 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피식 웃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라의 입장에서 변호하자면, 적어도 그녀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 즉 텐트 안에 있었습니다. 이 텐트는 이후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 장소로 사용되어 ‘회막’이라 불리게 됩니다. 사라가 비록 의심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장막’안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흔히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건 그 사람 실력이 아니라, 누가 뒤를 봐주느냐 하는 거지.’라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의 약속과 소망 그리고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비교할 때 우리 각 사람의 의는 절대로 깨끗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는 인격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 하늘나라의 약속과 소망 그리고 영생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분명히 개인의 자격과는 무관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축복과 영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의 실력 즉,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보다는 우리가 누구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과 약속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공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허영심이나 자기중심적인 모든 자아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위해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영혼을 위한 사랑을 부어주시며, 세상적인 정욕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님 안에 항상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도록 부르실 때 꿈과 환상과 비전을 보여 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자주 인도하십니다. 고아이면서 말주변 조차 없었던 양치기 모세를 부르셔서 당대의 최고의 권세자와 맞서게 하시고,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눈에 비친 기드온의 모습은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작은 자였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과 같이 연약한 자를 사용하셔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과 하나님의 천사 사이의 대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의심을 하거나 질문을 갖는 것 자체는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때의 기본 원칙은 그들의 인간적인 본성을 고려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기보다 그 질문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하나님 자신임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스스로를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자유케 하는데 쓰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교시적에 학교 축구팀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팀은 매년 우승을 할 정도의 강팀이었지만 사실 저는 후보선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경기 초반부터 끝까지 뛸 수 있는 주전선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제게도 골을 넣을 기회가 왔습니다. 사실 제가 골을 넣은 것은 수비수와 골키퍼를 제치는 현란한 플레이 덕분이 아니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위치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골키퍼가 쳐낸 공이 문 앞에 있었고 저는 단지 공을 밀어 넣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수비가 뻥 뚫린 상황에서는 축구헌수라면 누구나 눈을 감고서라고 가볍게 골인을 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비록 사라가 의심을 품긴 했지만 적어도 사라는 ‘장막’ 안에 머물렀습니다. 성경에서 ‘장막’은 언제든 원하는 곳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성품을 드러내실 때 늘 똑 같은 방식이 아닌 독특한 방법으로 나타내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모세는 장막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끗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에서 2주 동안 치유와 기적의 성회가 열린적이 있습니다. 2주째 되는 주일 예배 설교를 마친 후에 저는 어떤 종류의 질병이든지 육체적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약 75명의 사람들이 기도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왔고, 500여 명의 회중이 팔을 뻗어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회중 가운데 맨 뒷줄에 앉아 있던 케빈이라는 한 남성에게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몇 년전 팔꿈치가 부러진 이후 그는 팔을 똑바로 뻗을 수도, 팔을 굽혀 자기 어깨를 만질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팔이 펴지자 매우 놀라며 기뻐했습니다. 케빈이라는 남성이 기적을 체험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자 계획한 정확한 때와 장소에 그가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탄식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정하신 때와 계획을 분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에게 겸손히 반응하지 못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통 종교적인 생각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문했던 시기를 놓쳐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침묵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리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외치는 그러한 가르침을 언제나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라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완전한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중 한 사람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속한 소망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그분과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격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법을 진정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생각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의 의지를 드리는 것입니다.
- 월리엄 템풀 -
<하나님과친구되기/마크 듀퐁/큰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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