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복음전도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 성경 구절을 지주 인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잃어버린 영혼들이나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친구들로서 우정을 나누고 싶은 그분의 깊은 갈망을 이 말씀을 통해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성령을 선물로 주신 이래로 지난 2천여 년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초대하기 위해 성령이 계속적으로 부어져 왔다고 믿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이런 초대는 오늘날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2천년 전 교회가 직면했던 것들보다 훨씬 다양하긴 하지만, 사실 그 문제들의 핵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혹은 누가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우리 마음의 초점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 자체에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할 ‘들을 귀’ 있는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오늘날의 교회는 신학과 교리만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관연 하나님의 마음을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율법적인 교훈을 따르려는 종교적인 삶이 아닌 예수님과 실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과거에 이해된 것처럼 신학적인 이해나 단순한 믿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토대는 그분과 우리가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몇몇 오랜 전통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는 ‘됐어요. 제발 거기까지…… 그만하세요! 우리는 감정에 치우쳐서 신앙생활 할 수는 없어요.’라는 식의 우려를 표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전하려는 내용은 단순히 감정에 민감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을 느끼고, 경험하고, 성령님에 대해 깨달아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해서 인도하시지 않나요?’ 라고 질문합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삶 가운데 환경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가 아들과 딸로서 친밀함 가운데 그분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다윗, 기드온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나아가 예수님께서도 역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단순히 말씀 혹은 과거 하나님이 하셨던 약속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 나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미국 새표준번역본 성령에서는 성령님을 ‘도움을 주시는 분(helper)’으로 묘사합니다. 킹제임스 번역본은 성령님을 ‘위로하시는분(comforter)’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님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성령님은 아주 고귀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을 우리의 영에 불어 넣어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으로서 친히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성령님의 주된 역할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주님의 바람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야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은 하나님의 속성,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에서 표현했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잘 나타나 있으며 형상화 되어 있습니다. 완고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은 분명히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로서의 주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어떤 부흥 사역자들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죄의 삯은 사망일 뿐입니다! 라고 맞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를 섬기는 사람들은 구제를 말하며 선행을 강조할 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함과 긍휼함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상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권위를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비록 죄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함께 거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죄인된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가 증언하듯이 사람들이 타인에게 악을 행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모욕했다 할지라도 주님은 어떤 사람도 멸망하거나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요나서에는 회개하지 않는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심판을 내리기보다 어떻게든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때 보내심을 받은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만연한 도시 니느웨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주권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니느웨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계획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요나3:10)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전지 전능하심과 절대 주권으로 사실상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고 주장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용서받을 자들로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저 또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로 회개를 선택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을 감동시킬 기회를 주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존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단지 육체적인 정욕 정도로 잘못 알고 있거나, 평생토록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배우자보다 자신의 일이나 우정에 더 몰입되어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께 있어서 사랑은 진정한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더욱더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있어서 전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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