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리스도인?
요즘처럼 기독교가 인기 있는 시대는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명함 한 장 지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하여, 사교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교회에 나가고 쉽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교인이 된 후의 편리함을 즐깁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세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 되는 생애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아주 명백합니다. 예수께서는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제자 됨의 대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 가겠고 태평양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소!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추신 - 오는 수요일에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 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요!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겠습니다.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습니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합니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합니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 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입니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똑같이 좋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웃는 농담들과 코미디 쇼들을 보면서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면 우리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뒤늦을세라 유행 옷을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요? 속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거리,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습니까?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나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설 수가 있을까요?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습니까? 백만불? 천만불? 아닙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주의 비유”에서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대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대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입니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입니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입니다.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매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 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값비싼 은혜를 찾아서 - 은혜의 진정한 의미 -
기독교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은혜”란 단어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또는 축복을 받기 위하여, 또는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은혜”가 제시되고,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값싼 은혜를 남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은혜”란 단어는 진정한 반쪽의 의미를 잃은 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 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대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 채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12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전수되고 있었습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 데에는 희생적인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비록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맡아보던 성직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 조직의 타락한 모습을 가리우는 가면으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부르심
종교 개혁시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복음인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거쳐서 수도승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완전한 순종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를 위하여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제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며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는 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속이 수도승들의 심장부에 찾아들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하던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는 미묘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종교계가 이처럼 바닥까지 타락할 즈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에 대항하여 일어섰습니다.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손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아있던 자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리게 되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신앙적인 평판도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였습니다. 루터는 “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 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는 수도원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갔던 것입니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세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개심은 그 당시 종교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수도원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해 받고 있는 루터의 믿음
어떤 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입니다. 그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하였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위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르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마다 희생적인 대가를 치르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대가로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은혜는 그에게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열성적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틴 루터가 은혜에 대해서 깨달았던 바입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돌리고자 했던 루터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혹독한 규율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나 직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 루터는 수도승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하였을 뿐입니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보다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값 싼 은혜가 가져온 재앙들
만일 은혜가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낱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믿게 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 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합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붙들게 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깊은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도 극적인 대조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상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그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대가를 면제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 값을 치르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요?
매우 미묘하고 혼돈시키는 기만이 여기 있는데,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공히“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크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것을 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사의 정신으로 대가를 치르면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위해서 골몰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극단 또는 이단으로 정죄 받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루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성직자로 신뢰받고 있지만,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은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싼 값으로 책정되었으며,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커다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수많은 사람들을 도매 값으로 침례 주며, 회개하고 진리를 확신하는 일없이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마땅히 책망 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 은혜의 샘을 퍼붓듯이 나누어 주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가르쳐졌던 그러한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 대 위에 던졌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나요?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값싼 은혜를 가르친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입니다.
구원을 빼앗아 가는 값 싼 은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입니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가리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의 삶을 이끌어 갈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계명의 행함에 대한 오해보다 훨씬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는 큰 교단에 다니는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제자 되는 직분(discipleship)”과 “은혜”사이에 존재하는 상관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값 비싼 은혜 - 참 은혜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써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