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왔노라. 정말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나 점까지도 빠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있는 아주 작은 것까지도 버리거나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얻을 상은 아주 작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대로 준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게 된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죄인 된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험악한 세상에서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날마다 묵상하며 그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도우시고, 깨끗하게 성화를 시켜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말씀을 듣고만 끝내지 말고 계속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시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아름다운 시온을 유업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없느니라.(요14: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요단강을 끼고 있는 에브라임 지역에 온 것은 니고데모의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사로의 농토가 있었으며 농토를 관리하는 농부들과 몇 채의 건물이 있었기에 안성맞춤이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심부름으로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였다. 나사로는 베드로에게 니고데모를 예수님께 은밀히 안내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밤중에 기드론 골짜기에서 기다리던 요한의 안내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요3:2-10).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총회에서 예수를 체포하려함으로 안전한 나사로의 집으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당들의 박해가 친구인 나사로에게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무네 에브라임으로 옮긴 때에 이 말씀을 강론하셨다 한다. ( 나사로 데오빌로(Λάζαρο Θεόφιλε)의 아버지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나사로의 아버지는 헤롯이 유대 왕으로 부임하기 이전에 유대총독부 집정관으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시리아 총독 ‘디오빌로(Θεόφιλε-눅1:3,행1:1)’가 나사로의 아버지다. 그의 가문은 로마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음을 말한다. 이것이 니고데모가 나사로의 집이 안전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이란 두 가지 용어를 적용할 때에 잘못 생각한다.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먹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는 때를 생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숨 쉬고 먹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일하지 못하게 감각이 없는 육체가 되어서 무덤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때를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셨다.
1. 생명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생명은 존재가 아니라 하신다. 그리고 존재가 생명은 아니라고 하신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생명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들판에서 울고 있는 양도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생명은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지 않을 뿐더러 육체와 함께 끝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며, 생명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육체 안에 살도록 만들어진 영혼으로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태어날 때에 시작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죄가 그것을 죽일 때 끝나게 된다. 처음에 사람은 발육하는 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 씨는 밀이나 과실의 씨가 그런 것처럼 부질(麩質)이나 골수가 아니라 살로 된 씨다. 맨 처음에는 그것이 양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태아와 다를 바가 없었던 동물의 태아로 형성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임신된 인간 안에 형체가 없으면서도 인간을 높여주는 보이지 않는 속에서 더 강력한 부분이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동물적 태아가 심장과 박동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대로 살도록 하나님의 모습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미래에 하나님의 시민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되어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란 형체는 그대로 가지고 있게 된다. 이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분해되고 무덤이 되어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다”(렘1:5) 그러므로 생명은 육체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 생명은 끝이 없다. 생명이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있으나 그의 운명은 죽지만 그의 받을 벌을 위해서는 살아남는다. 생명이란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그 순간에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과 저주라는 운명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운명에 대한 죽음이라는 신체의 조직 일부분이 그 기능이 소멸상태에 걸려있는 생명은 영원한 세월을 두고 영벌과 고통 속에서 연장된다. 이것은 신체조직의 일부분이 생활력을 읽게 됨으로 인하여 기능이 소멸되는 것이다.
반대로 창조된 그대로 보존된 생명은 창조주와 같이 영원하고 완전하고 행복하게 될 때에 온전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어떤 것이든지 정성을 들여서 쓰고 보존해야 된다.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만큼이나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왕의 선물을 마구 쓰겠는가? 그럴 수 없다. 왕의 선물은 집안의 영광으로 대대로 물러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선물을 냉대하는가? 하나님의 선물을 어떻게 쓸 것이며 또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천국의 꽃 같이 내 영혼의 꽃을 생생하게 가꿀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보존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늘을 위하여 그리고 존재를 넘어서 ‘살게’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은 분명한 계율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사람이 이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모범과 말을 주는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교훈이다. 세상에는 의인들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되지만, 잘못생각 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결점들과 사방에서 불어나는 죽은 정신들을 보신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우리의 영혼의 문을 열라고 하신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라 하신다. 변함없는 율법을 지키고, 자신의 안에서 타락되고 지쳐버린 ‘생명’을 튼튼하게 살려야 된다고 하신다. 만일 생명이 벌써 죽었으면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야 된다. 모두가 자기 죄를 한탄해야 된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어야 된다. 그리고 일어나야 된다. 내일 영원한 고통에 넘어져서 산송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다시 찾거나 보존하는 방법 외에 다른 말씀은 안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회개하고, 음란이나, 부정한 행위와, 자신의 죄를 없애고 깨끗하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참 하나님의 은혜의 목소리를 들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마음에 내려오기 바란다.’하며 영원하신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가르치지만 죽은 영은 추운 겨울에 잎이 떨어진 수풀보다 더 초라하다.
겸손과 의지와 회개와 믿음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가면, 봄이 되어 숲이 살아나듯 한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이 생명이 다시 살아나야 된다. 하나님을 위해 활짝 피어나는 참 생명으로 영원한 열매를 맺어야 된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는 ‘길’이시다. 우리에게 선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참 목자’시다.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빛’이시다.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가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예수 앞으로 나아와야 된다. 더 이상 존재하기만 하는 것을 그만두고 ‘살기를’ 바라야 된다. 그렇게 하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황혼이 보이는 하루의 시작, 권태도 없고 한계도 없는 기쁨의 시작이다. 죽음의 육체이전부터 살고 있는 것의 승리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도록 부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생명을 원하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아야 된다.
육신이 건강치못한 사람이 그런 이유에 속한다. 건강에는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이 있다. 영적이거나 육적이거나 어떠한 병에도 사탄의 침투를 막지 못해서 병이 생긴다. 사람은 육체의 고통 때문에 반항과 실망하며 하나님과 멀리하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탄은 육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육체에 병을 만들어낸다. 사탄이 정신적이나 혼에까지 병을 만드는 것은 영벌로 끌어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병은 사탄을 통하여 들어왔다. 질병과 죽음도 세상에 들어왔다. 타락도 함께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병과 고통의 근원을 분명히 깨달아야 된다. 그가 사탄을 통해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는 불행이 되는 원인이 그 사람이 사탄의 도구라서 그렇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2. 병은 무질서 때문이다
병은 자기 몸이 질서를 지키지 않는데서 생긴다. 하나님은 사람을 건강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사탄이 가져온 무질서가 육체의 약함이 병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나 치명적인 유전들을 가져왔다. 사람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원죄를 물려받았다. 사람의 원죄라는 홈이 점점 커지면서 세 가지 분야로 사람에게 침투된다.
첫째는: 점점 더 타락하고 그로 인하여 약해져서 병든 ‘육체’로 고통을 당한다.
둘째는: 점점 더 교만하고 교만으로 인하여 더 타락해져서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완고한 ‘마
음’으 로 변한다.
셋째는: 점점 더 우상숭배적인 것이 되는 ‘정신’으로 변해진다.
이러한 세 가지는 절대적으로 순결치 못한데서 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진짜 죄는 교만이라 한다. 그 이유는 교만에서 모든 죄가 생기기 때문이란 것이다.
첫 번째는: 창세기에서 천사장이 하나님의 보좌를 빼앗으려는 ‘교만’이 죄의 근원이다.
두 번째는: 같은 창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을 때, 하와가 자기 위치를 떠남으로서 인류에 죄
가 들어왔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무질서’의 시작이다.
교만은 죄의 근원이 되고, 교만으로 불순종이라는 무질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병들지 않으려면 순결해야 된다. 순결하지 못하면 입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지만 질서 안에 있는 사랑이 나타날 수 없다. 순결하지 못하면 결코 순종하려는 자세가 나타날 수 없다. 순결하지 못하면 겸손이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죄의 근원까지 도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병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정신과 마음에 새기고 내재적 자아에 소유권을 나타내는 인침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하면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사탄이 도망간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것의 질서가 무질서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3. 육신에서의 무질서
육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육체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성병이 왜 생기는가? 성적질서를 지키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마약 등, 모든 것이 육체의 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서 인간의 육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보약이다 병원이다, 찾아다니지만 끝내는 죽게 된다.
4. 마음에서의 무질서
육체가 병들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 육신적인 질서를 지키지 않음과 같이, 사람이 타락하는 것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이라는 생각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지배하는 질서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된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며 모시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이 일어나면서 하나님과 멀리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데서 알려준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렸을 때,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한데서 알게 된다(눅5:8). 그리고는 마음이 타락되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죽이는 행위다. 이것을 마음에 화인 맞았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는 죄를 은폐하려고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거짓증거하고, 기만하고, 자기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의 질서를 지키지 않은데 있다. 하나님께서 시기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등이 하나님의 법이요 이 법을 지켜야 ‘질서’다.
5. 정신에서의 무질서
정신병이나 정신장애는 정신의 질서를 지키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정신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영혼이다. 자기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자리를 만들어 놓으면 그런 사람 안에는 성령이 계시면서 순결한 마음으로 살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영혼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탐심과 유혹에 끌리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있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 무엇이 앉아야 되는가? 귀신이다. 귀신이 자리 잡게 되면 항상 더러운 생각만을 넣어주고 타락하는 쪽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병드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문제를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주인을 누구를 모시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의 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했던 때와 같이 온전하게 보호해 주신다. 그러나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므로 사탄이 마구잡이로 쓰기 때문에 혼탁한 병이 생긴다. 사탄이 인간의 영혼에 침투하는데 쓰는 두 가지 무기는 본능적인 ‘유혹’과 ‘탐심’이다.
마귀는 항상 인간을 물질적인 면으로부터 유혹한다. 그리고 물질문제가 끝난 다음에는 윗부분으로 침투한다. 먼저 도덕적면을 공격한다. 그것은 교만과 탐욕으로 생각나게 만든다. 다음에는 정신을 공격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각까지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탄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Agapao)하는 대신에, 다른 인간적인 사랑(Phileo)들을 마음속에 심어버린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없애버리고 다만 행락과 자신의 욕구만 채우려고 한다. 이런 데를 점점 더 몰두하게 되면 송두리째 사탄에게 빠지고 정신은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럴 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일어나고 또는 정신에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6. 사랑은 무질서가 아니다
개인의 육체와 마음, 그리고 정신에 문제가 일어나는 일이 그것에 대한 질서가 지켜지지 않음으로서 육신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드는 것처럼, 모든 공동생활에서도 같은 원리다. 이 문제에 가정이라는 공동생활, 교회라는 공동생활, 직장이라는 공동생활, 사회라는 공동생활, 나라라는 공동생활, 생활전반에서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용어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사랑하라는 분부시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질서’를 말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법을 떠난 자신의 욕구만’을 말하고 있다
질서를 지키려는 사랑과,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분명히 다르다. 생명을 살리려고 질서를 지키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사탄이 가져다주는 멸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질서를 지키려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게 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사랑은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죄의 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이것은 개인의 육체나 마음, 그리고 정신에 사탄이 침투했기 때문이며, 결국은 영생과 영벌이라는 두 갈래 길에서 선택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둘 중 어느 한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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