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장군이 이처럼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한번 맺은 그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대통령의 체면을 봐서라도 모른 체 하고 넙죽 받아 마셔 버릴까?..... 그러나 나 장군은 하나님과 약속한 그 굳건한 믿음의 정절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이윽고 드디어 나 장군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각하 저에게는 술 대신 콜라나 사이다를 주십시오! 저는 술을 못합니다!" 일언지하로 대통령의 축하 술잔을 거부해 버리자 박정희대통령은 나 장군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이 날의 이순간을 지켜봤던 한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고 난 후 엄청난 정적 속에 잠긴 것이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본 격이 된 대통령의 굳은 표정을 본 국방 장관이 순간 벌떡 일어나 "각하 나 장군은 원래 술을 못합니다. 그 잔은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하고 잔을 뺏다시피 하여 단숨에 마셔 버렸다. 대통령의 체면 손상! 그 위기의 순간을 국방장관의 기지로 일단 넘어갔지만 만찬장의 분위기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만찬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은 의기소침해 있던 나 장군에게 다가 가더니 "니가 진짜 기독교인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찬장을 나가버렸다.
이슬람권 국가 원수가 방문하는 나라의 만찬 석상에서 양국 국가 원수가 건배를 할 때 어떤 종류의 술을 사용하느냐를 두고 양국 외교 팀의 사전 의논과 준비는 항상 골칫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국빈 만찬에서 건배의 순서는 배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서로 진행된다. 참고로 아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거절 당한 예는 이때가 아마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예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날 만찬이 끝났을 때 박종규 경호 실장이 나희필 장군에게 다가와 "선배님 해도 너무 했습니다! 꼭 그렇게 각하에게 망신을 주어야 합니까? 국군의 통수권자요 대통령으로서 손수 축하의 술 잔을 권하면 정중히 받아서 입잔 이라도 하는 척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분 초를 따지며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 또한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살펴야 하는 경호 실장으로서 이 날의 그 순간의 초조함과 그 고뇌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이 떠나간 후 선배 장군들이 나 장군에게 찾아와 너무 경솔했다는 질책을 했다. "이 사람아 별을 하나 더 달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인데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지 내일 일찍 책상 정리나 하게.”‥‥‥‥
사단장 관사로 돌아온 나 장군은 정작 매우 불안해야 될 자신의 마음이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면서 "내가 과연 그 정도의 신앙에 대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참 이상한 일이로다. 내일 당장 청와대에서 어떤 책벌이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앞날을 책임져 주시겠지 내가 육사를 졸업할 때 구대장께서 장교가 되어 술을 안 먹으면 출세를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나를 오늘날 장군까지 진급시켜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나 장군은 기도와 함께 이날 밤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런데 나희필 장군은 왜 술을 그토록 싫어했을까? 그것은 아마 어린 소년시절 술을 자주 마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항상 고생하던 모습이 그가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항상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 크게는 당시 평양에서도 소문난 전도사인 어머니(임태화)의 눈물의 기도가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이유로 자신이 모태 신앙인으로 술을 자주 마시게 되면 인생을 사는 동안 술의 즐거움보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편 군복을 벗을 것으로 생각한 나 장군은 다음날 책상 정리를 끝내고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책은 오지 않고 오히려 별을 하나 더 달고 소장으로 진급,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으로 영전되었고 다시 3군 사령부 창설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했다.
나희필 장군의 군대생활에는 아무도 모르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월남전이 치열할 때 우리나라 장성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월남으로 갈 때는 꼭 대만의 한 호텔에서 1일 숙박을 하게 된다. 잠이 들 무렵 호텔 지배인이 나 장군 방을 노크 하더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책 한 권을 건넨다. 여자들의 나체 사진첩이었다. 한 사람 골라 주시면 보내 주겠다고 했다. 물론 돈은 출장비에서 계산이 다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나 장군은 이를 거절하고 내일 새벽 교회를 가야 하니까 교회 위치나 알려 달라고 했다. 그 후 이 호텔 지배인은 한국의 고위 인사들이나 장성들이 이 호텔에 유숙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립이래 그렇게 청렴한 사람은 과거도 지금도 오직 한국의 나 장군 한 사람 밖에는 없었습니다‥‥‥‥
나 장군의 부인 박영례 권사는(새문안 교회) 이 일화를 필자에게 두 번이나 알려 주었다. 특히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이 그것도 공짜로 수청(?)을 들겠다는 아가씨와 하룻밤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평소 남편의 믿음이 그날 밤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러니 박영례 권사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그 애틋한 사랑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루빨리 남편과 천국에서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한편 나 장군이 육대 총장에서 만기 제대 예편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나희필이는 더 있어야 할 인물인데"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나희필 장군이 제대 후 어느 날 밤 심야에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의 차장보 자리의 인선문제로 며칠 밤을 지새던 김재규 부장은 문득 나희필 장군이 생각나 새벽 두 시에 전화를 했다. "나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 자리에 앉을 가장 적임자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시오" 당시 이 차장보 자리는 중앙 정보부의 막대한 예산 집행에 관여하는 요직이기 때문에 청렴 결백성이 요구되는 인물을 추천해야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을 수가 있었다. 김재규 부장의 보고를 받고 난 박정희 대통령도 흐뭇한 표정을 지우면서 "일국의 국가 원수가 친히 권하는 축하의 술 잔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믿음의 장군 나희필이야 말로 그 어떤 압력도 부정도 유혹도 능히 거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잘 추천했다"라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또한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도 나희필 장군에 대한 칭찬을 자주했다.
얼마 후 대통령은 나희필을 다시 장관급인 비상 기획원 위원장 자리로 영전시켰다. 그런데 만일 이때 영전이 안되었더라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자리에 나희필은 김재규와 함께 꼭 참석을 해야만 되는 확정적 인물이었다.
끝으로 박 대통령이 비명에 쓰러진 지 14년이 지난 1993년 9월 16일 위대한 신앙의 장군 나희필 장로는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새문안 교회 김동익 목사의 눈물의 기도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오히려 목사를 위로하면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고 먼저 떠납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목사님,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찬송가 455장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주 안에 있는 나에게)‥‥‥청초한 가을 백화처럼,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 안에서 포근히 잠든 모습처럼, 그는 허물 많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하직하고 너무나도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죽어도 그 일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으며 재앙이 닥치기 전에 내가 그를 데려가도 그 사실을 깨닫는 자가 아무도 없구나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죽어도 평안과 안식을 얻는다"(현대인의 성경 이사야 57장 1절∼2절)
[출처] 믿음의 장군 나희필의 굳건한 신앙작성자 예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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