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2009

믿음과 행위, 구원과 행위와의 관계 1


1.  진리와 행위와의 관계
흔히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목숨 걸고 싸울 필요가 없다” 라고들 한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행위와 삶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교리보다 절대로 중요한 문제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상 교회에서 구원의 교리를 다룰 때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교리를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교리를 삶과 올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무엇보다 삶과 행위가 결여된 교리는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개신 교회 안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그리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선한 행위를 열매로 맺는다는 점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율법주의 가르침에 대한 경계가 있다. 반면에 형식적이고 외선적인 교회의 모습에 실망이 폭발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단순하고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는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 원인은 성경을 이해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지나치게 단면적이고 지식적인 교리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변함 없이 신실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과 결과를 초래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진리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또 다른질문이다. 삶의 세세한 문제들은 대부분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많은 내용들을 보면 행위가 구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문제는 외면적인 행동은 내면적인 인격과 신념의 표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삶은 진리에 관한 믿음을 표출하는 현장이다. 따라서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는 무엇을 믿는가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2.  구원과 행위(율법)와의 관계
이 주제는 순서상 뒤에 놓여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먼저 다루겠다. 행위와 구원은 상관이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위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누구를 또는 무엇 믿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고, 어떻게 그 믿음을 유지하는가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행위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열심은 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대항하는 역겨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10:2,3). 우리는 결코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 하지만 믿음은 단순히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 기능이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구원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아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서 자신을 값으로 산 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행위와 구원의 관계에서 항상 갈등하고 있고,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행위를 강조하면 율법주의라고 정죄를 하고,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면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니 목숨 걸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반대로 믿음만 구원의 방편으로 강조하다 보니 변화되지 않는 삶이 문제가 된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외쳐지는 은혜의 교리는 너무 무가치하게 취급을 당한다.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본받고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교묘하게 악용되어 왔다.

예수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고 그의 삶은 본받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주장하며 예수님의 이름과 믿음을 악용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7:15-26). 단순히 이신칭의의 교리로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구원을 논할 수 있는가? 이신칭의의 교리로 볼 때 마 7장에 나오는 위선자들은 구원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신약 성경에서 율법주의를 경계한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종류의 율법 준수를 통해 의롭게 되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과 거룩하게 됨을 붙잡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의식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이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의 기준인 율법 자체를 부정하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과 자유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처럼 서로를 보완하고 완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율법의 핵심과 요약인 십계명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성도의 삶의 기준이다. 교회는 위의 두 가지 주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모든 성도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항상 가르치고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율법주의라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도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하고 사랑하며 섬기도록 가르쳐야 하며, 부모와 형제자매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거짓되지 행치 않고, 범죄치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거룩한 삶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은혜와 율법을 서로 상충하는 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이 잘 조화되는 것처럼 서로를 보충하고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 선행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은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항상 은혜를 받고 누리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에 대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과도 같다.

은혜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구원의 서정에서 간과하는 것이 값 싼 은혜라면, 항상 은혜 속에서 살기 위해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거짓 은혜이다. 진정한 은혜는 비록 자신은 값 없이 선물로 받았지만, 그 선물에 담겨진 무한한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면서 받고, 그것에 감사와 사랑과 헌신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삶은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한 삶의 자세이어야 한다.

이것은 성도가 받은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죄를 용서받는 은혜를 받았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 없이 의롭고 거룩해졌다. 그러면 당연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획득한 의와 거룩함을 잘 지키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올바른 자세이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에 대한 요청을 받을 때, 그것을 율법주의라고 정죄하며 부담을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 요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죄성 때문이다. 도리어 우리는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끊임 없이 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유의 율법의 요청, 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는 신구약의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것들의 억압과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죄를 이기고 지배하며, 주권적으로 율법을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어가는데 사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행위가 불신자의 구원이 아닌 성도의 구원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지는 다음 주제들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3.   이신칭의와 행위와의 관계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은 다른 형태로 교회 역사에서 줄곧 제시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된다. 한 번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구원의 여정에서 이탈할 수 있는가?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이 타락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변하고 있다. 10:26절 이하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참고 히 6:4; 벧후 2:20, 21)

칭의는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칭의는 믿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완벽한 구원을 보장하는가? 성경을 통해 얻은 답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책임을 항상 동일하게 강조한다. 성경은 절대로 한쪽으로만 치우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성경이 성도의 구원에 대해 언급할 때 결코 이신칭의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삶의 문제, 더 나아가 구원의 문제로 전진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칭의와 구원은 서로 다른 단계에 있으며, 칭의가 구원으로 이행될 때 칭의는 꽃을 피운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며, 마음의
결단에서 행동으로의 이행이다.

비유하자면, 칭의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과정이지 이미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선고 받은 칭의와 구원은 좁은 길을 따라 끝까지 종착지까지 나아감으로써 지켜지고 보장되는 것이지, 좁은 길을 버리고 돌아서는 자에게까지 보장된 것은 아니다( 13:10-30).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회복과 확장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세상과 짝하여 자신의 행복과 영광만을 추구하면서도 마치 자기에게 구원이 보장된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경고로 주신 주님의 비유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도 않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성경이 인간의 책임과 의지와 행위를 강조하지만 한 번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거스릴 만큼 절대적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이신칭의와 행위의 문제를 아주 정교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다. 타락한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자신의 더러운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부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은혜로 선물해 주셨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은혜를 완성하기까지 이루어 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다.

성경에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경고는 하나님과 화목하며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은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 교리와 모순되지 않지만, 행위를 무시하고 이신칭의만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충돌을 일으킨다.

구원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행위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행위가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해 놓고 논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행위는 구원과 아무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넬료를 예로 들면 하나님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고 말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들고 믿은 것은 후에 베드로의 방문과 설명을 통해서였다(10).
구원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의로운 행위를 항상 대립적인 관계로 보는 사람들은 고넬료의 의로운 행위와 믿음의 시간적 순서, 그리고 고넬료의 경건함을 보시고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결정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할 때 이것은 어떤 부흥사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무나 구원할 자를 선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무나 사람들을 선택해 놓고,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신다. 고넬료의 행위가 구원에 이를 만큼 완전한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을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자주 바울 사도가 이신칭의를 강조한 의도를 왜곡시키고 있다. 바울의 강조점은 이신칭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율법주의자들의 행위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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