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가르침과 신약의 가르침은 하나도 상충되고 모순되는 것이 없다.
심지어는 율법도 복음과 대립적이지 않다. 율법은 몽학선생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에게 죄를 깨우치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신약에서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구약의 율법 의식들도
실은 폐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자였는데,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성취되고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구약에서 이신칭의에 대립되는 행위 구원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 못지 않게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모든 심판의 근거는 사람들의 행위에 의한 것이다.
에스겔
3:17-21 “…...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 ” 의인이 타락하는 것은 구약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신약에서도 분명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라면 구원에 있어서도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말하는 행위란 은혜와 믿음이 배제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
4.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
믿음이란? 넓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정의한다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여 그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의지하고 바라며 그분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마
6:25-34).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하며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히 11:1).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와 구원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다.
히
11:1을믿음으로 정의하든, 믿음의 성격으로 정의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믿음이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믿음은 항상 지적이고 의지적인 것을 뛰어넘어 위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를 씨앗처럼 품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실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항상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은 그의 믿음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반드시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수 없이 많지만 결국에 그 믿음의 성취를 체험한다는 점에서 생명력이 있다.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서 이삭을 받은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는 그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삶의 세세한 행동의 발자취로 구성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발차취가 믿음에 의해서 옮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개별적인 발자취가 모두 구원과 직접
관련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총체적인 발자취는 그의 삶의 목표와 방향, 즉 구원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좁은 길을 가다가 잠시 길을 벗어난다고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아예 좁은 길을 벗어나서 넓은 길로 간다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심지어는 한 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자비와 구원을 간청한 강도도 그 구원의 서정이 극도로 짧았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길을 버리고 이 좁은 길을 통과한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을 복종하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복종하는 한 그 자체로 선한 존재였다. 그리고 인간의 선한
행위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 사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복종하지 않고 행해지는 선한 행위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닮지 않은 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 자체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은 단지 그가 단 한 가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자신의 의로우심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선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타락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리스도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미신을 믿는 존재이든, 심지어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구원을 받기 전이든, 구원을 받은 이후이든 하나님의 선한 형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선한 행위, 즉 믿음의 열매가 없이는 구원도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한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5. 행위와 심판
마
5:20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이신칭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 즉 성도의 인격과 삶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성도가 구원에 이르는 의는 최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위선적인 인격과 삶보다 못한 성도는
참 성도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신구약 모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도의 기준은 인격과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
시
24:3-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무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롬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심판과 보응이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롬
2:6-8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각자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심판과 보응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시행된다. 성경이 이신칭의를 언급하지 않고 삶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신칭의 교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초보에서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은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칭의를 선고받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가는 것이다. 심판은
내면의 상태와 인격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고, 모든 행위를 달아보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이나 행위가 없이는 심판도 보응도 없다.
심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신자들에게는 불신과 양심과 악행이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죄를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기정
사실이다(요 2: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불신자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양심과 행동이
근거가 된다. 롬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둘째,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인격과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알에서 시인(고백)하지도 않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형식적이고 외선적인 그리스도인들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심판과 보응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과
믿음에 대해서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삶에 대해 집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이신칭의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니라 믿음 이후의 인격과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6. 결론
믿음과 행위,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과 행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행위의 문제는 어느 것 하나와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처럼 조화되는 관계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강조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상당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는 방법은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거룩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로워지지
않은 성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성도를 생각할 수 없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혼동할 필요가 없다. 율법은 성도들의 삶에 여전히 선악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기준을 알려주고 인도하는 표준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비하면 초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높아짐을 위하여 낮아지셨고, 우리의 부하게 됨을 위해 가난해지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진실하게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한 욕심과 야욕, 쾌락과 안일함, 세상
영광의 추구를 배설물처럼 던져버리고, 단호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
말세에 재물축적과 세상의 안락에 눈 멀어
삼손처럼 모욕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재산도 많고 성도도 많아서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과
무지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 소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안티그리스도들에게 치부가 드러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비난당하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처음 사랑과 충성도 팽개쳐 버려 더 이상 교회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과 음란하게 짝하고 세속화되어 실상 죽어 있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만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또한 행위를 살피시는 분이시다.
특별히 목회자인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다른
사람의 구원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쓰임받음을 위해서도 절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9:26-27에서 바울의 외침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목회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중요한 일과로 삼으면서도
복음에 합당치 않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최고의 가르침이다. 주님이 오늘날에도 교회의 온전한 모습과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음성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들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진실되게 따르지 않는 모든 성도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교회들은
회개해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거룩하고 정결하며
충성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며, 열심을 내어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 행함이 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착한 마음으로 충성하는 종들만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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