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옷, 곧 세마포(브씨노스)의 내용은 중요하고 그 분량이 많아서 몇번으로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려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입혀져야 될 거룩한 옷입니다. 분량이 많더라도 매번에 올려지는 글이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한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출39:1)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거룩한 자에게 주어지는 옷입니다. 이러한 옷과 장신구가 지니는 뜻은특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줍니다. 제사장들이 그러했듯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들어가려면 자신을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이 진설상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찬양받도록 자기 내면과 가정과 교회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삶이 등대의 원리입니다. 항상 자신의 생애를 향연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살아가는 삶이 분향단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허물이 사함받아지는 일이 물두멍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속적인 일은 죽이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번제단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인정받아진 신자라야 옷이 입혀지는데, 그것이 의(행위)로 거룩하게 될때 입혀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사장들의 옷을 지으라는 명령은 3층천 하늘나라 시온의 축복과 연관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거룩한 옷에는 속옷과 겉옷으로 분류시키고, 겉옷 위에 걸쳐지는 장식들은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중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에봇과 견대와 흉패와 관 등, 이 네가지 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서 얻어집니다.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하라.(출28:1,3)
성경에서 거룩한 옷에 관한 명칭들을, '세마포, 두루마기, 깨끗한 옷, 예복'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루마기로 기록된 '스토레'와 '스트라스'는 발에 끌리는 일반 의복입니다. 깨끗한 옷으로 표기된 '네게아'와 '카고로스'는 옷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입니다. 세마포로 표기된 '리논'과 '호도니오스'는 '삼베, 베옷, 고운 베옷' 등 일반적인 옷입니다. 이러한 옷들은 하나님의 빛으로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입었던 옷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브씨노스)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8)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부활되고 휴거되는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입혀지는 브씨노스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옷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보좌로부터 발사되는 광채로 입혀지는 세마포는 순결함에서 받는 은총으로 깨끗하고 빛나는 영광의 빛이 브씨노스 입니다.
거룩한 옷은 구약에서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경배에 앞서 자신의 성결함을 이루고난 후에 거룩한 옷을 입고 지성소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막을 지을때, 지성소와 증거궤를 만들고, 진설상과 둥대를 만들었을 때에도 거룩한 옷을 입으라 하시질 않았습니다.
바깥의 번제단과 뜰과 물두멍을 만들었어도 거룩한 옷을 입으라 하시질 않았습니다. 성막뜰에서 기둥을 세우고 포장을 칠때도 거룩한 옷을 입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언제 거룩한 옷을 입히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모든 작업을 끝내고 손발을 씻은 후에 거룩한 옷을 입혀주었다는 교훈은 무엇을 말합니까?
출애굽 25장에서부터 기록된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본 식양대로" 곧 하나님께서 그려주는 순서대로 성막으로 지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순서가 성막재료인 조각목으로부터 입니다. 대부분이 순서를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기때문에 항상 벌거벗은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그후에 시내산에서 내려와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지시하여 지어진 순서가 출애굽기 35장부터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옷이 입혀진 시점은 성막뜰로 작업을 끝낸 다음에 손발을 씻고 거룩한 옷을 입게했습니다.(순서를 바꾸면 거룩한 옷을 입혀주지 않습니다)
의로운 세마포가 입혀지는 시점은 번제단에서 희생되고, 물두멍을 만들었어도 입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신의 삶이 향기롭게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사람에게 빛으로 깨끗한 세마포가 입혀져서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는 시온의 새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과 휴거됨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이 향기롭지 못해서 세마포가 입혀지지 않은 사람은 증거궤가 있는 지성소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 있는 시온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부는 더더욱 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감사와 기쁨으로 성막재료의 삶으로서 향연처럼 하나님이 받으시게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적인 거룩함과 외적인 의로운 삶으로 입혀지는 세마포와 연결되는 중요성을 교훈하는 것이 거룩한 옷에 있습니다.
두 가지 차이점
1. 증거궤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루는 사람은 (1).말씀의 권위에 순종합니다. 선포된 말씀이 어떤 말씀일지라도 기쁨으로 아멘하고 순종하며 따릅니다. (2).위임권위에 순종합니다. 자기에게 어떤 직분이 주어지든 아니주든 항상 감사하며 따릅니다. (3).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루는 사람은 질서를 존중합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아니하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정해진 질서에 순종하며 따릅니다.
세 가지의 순종은 거룩한 빛으로 세마포가 입혀지게 되는 기초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성화로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을 사람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성전안과 지성소까지의 삶으로 연결됩니다. 감사와 기쁨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밝게하고, 가정을 밝게하고, 교회를 밝게하고, 복음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데 주력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동거할 장막을 짓게하셨고, 하나님의 방과 내 방으로 나누기는 하였지만 항상 보시면서 지켜주십니다. 따라서 아름답고 향기로온 삶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의 전체를 주관하시고 거룩한 세마포(브씨노스)를 입히신다고 성경에 일렀으되,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브씨노스)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옳음은 헬라음으로 '디카이오마' 입니다. 내적인 거룩으로 이루어지고,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의라는 결과를 말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내용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궁리하는 사고로서 철학쪽인 사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는 개인적인 단순한 감성의 작용으로 추리에 의한 자기 개인의 사고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과는 지식이나 또는 세상적인 학문으로 말하게 되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와 성경의 교훈은 진리요 성경의 해석이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변증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됩니다.
행실은 헬라음으로 '하기오스' 입니다. 이는 자기를 경건하게 되도록 바르게 행동해서 국법(율법)이 아니라 계명대로 행동하는 믿음으로 인정되는 의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대제사장들 중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제비뽑고 거룩한 옷을 입히고 지성소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것은 옳은 행실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브씨노스)가 입혀지기 때문입니다.
세마포는 헬라음으로 '브씨노스' 입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사되는 빛으로 입혀지는 것이 '브씨노스' 입니다. 아름답고 찬란하며 빤짝 빤짝 빛나고 맑은 '광채(르코스)'가 고운 베옷에 더해졌다하여 깨끗한 세마포로 부르며 그냥 '베옷(리논)'과는 다릅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3:4)
옷(히마티온) 앞에 '르코스'는 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광채로서 '더 빛나게 된다'입니다. 헬라어 '해시오'로 발음되는 합당은 '상당한, 값이 나가는. 알맞는 합당한' 등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옳은 사람에게 빛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의 빛을 보내실 때 그의 영은 빛으로 입혀지는 것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2.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우 - 물두멍에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행위가 없는 이유는 (1).말씀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며, (2).위임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며, (3).질서를 존중하지 아니하고 자기 뜻을 이루려 합니다. 세가지 전체 또는 그중의 하나라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된다면서 원죄 사함만으로서 영원히 구원받은 식으로 생을 살아가는 것은 삶이 아니라 소유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행하기는 싫고 구원은 받아야 되겠기에 예수님의 의를 자기 의로 바꿉니다. 행함이 없는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성경에 일렀으되,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으로]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된 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못하였노라...(계3:1-2)
행위의 온전한 것이 없다는 뜻은 육신만을 위한 소유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행위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와 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또는 한번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등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이라.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느니라.(롬8:58)
로마서 기자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영을 좇으려면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망으로 가지 않으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라고 경고합니다. '죠에'로 발음되는 생명은 '생활, 살아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의미는 살기위해 생활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프라네마'로 발음되는 생각은 '마음, 목표, 포부'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생각을 생의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는 포부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기위해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살아가는 삶(Life)과 소유(Possess)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8장 58절을 풀어봅시다.
1). 평안은 '에이레네'로 발음합니다. 뜻은 '평화, 화해, 일치, 축복'등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생각이 일치를 말하고, 화해 곧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루어진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때문에 그 마음에는 평화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2). 원수는 '에츠드라'로 발음합니다. 뜻은 '적개심, 불화, 분리, 원수의 상태'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지 아니하는 존재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불화하기 때문에 문제를 삼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사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아니하고, 위임권위에 적개심을 품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3). 사망은 '다나토스'로 발음합니다. 뜻은 '죽은, 목숨이 끊어짐, 죽을 위험'등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육신만을 위해 생활하는 존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므로 죽을 위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포된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말씀에 변증하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또한 어떤 조직에서도 중직을 얻기위해 써클을 만들어서 그 조직을 어지럽게 합니다. 뿐만아니라 자기 뜻대로 되지않으면 그곳을 악평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갑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일수 없고 어린양의 신부가 될수 없는 것은 아직도 벌거벗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것은 물두멍에만 머물고 성전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생을 육신만을 위하기 때문에 흰 세마포가 입혀지지 않음은 믿음이 차지도 더웁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일렀으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고...(계3:15-18)
1). 곤고는 '타라이포스'이며, 뜻은 '심한 고난을 겪는다, 고통을 겪는다, 괴롭다' 등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함을 말합니다. 2). 가련은 '엘에이노스'이며, 뜻은 '불쌍하다' 이므로 불쌍한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3). 벌거벗음은 '굼노데스'이며, 뜻은 '알몸으로 드러남, 결핍된 영혼'입니다.
정리하면 물질을 쫓아가는 생은 부요해서 생활하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므로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면을 볼때, 결핍된 영은 알몸으로 드러남이 괴롭게 고통을 겪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존재가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사되는 빛나는 광채로서 세마포 옷이 입혀지지 않는 원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예수를 믿는다고 외치기는 하지만 속 사람은 알갱이가 없는 호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조건은 거룩한 세마포와 면류관이 있어야되는데, 날마다 육신만을 위하는 존재로서는 거룩할 수 없겠기 때문에 신부가 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환난에 남겨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날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가장 불행한 부분이 바깥과 우두운데와 쫓겨난다는 단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벌거벗은 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2:11-13, 8:12, 눅13:28)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1,42,50, 7:23)
물론 우리는 영어성경, 한글성경에 근거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전에는 분명하게 설명하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사고, 또는 자기 경험에 바탕을 두고 변증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앞에서 말하는 예복은 세마포(브씨노스)를 말합니다.
사환들은 천사들입니다. 벌거벗음은 세마포를 입지 못함을 말합니다. 바깥을 연단장과 낙원의 교정장소 중에서 어느 곳으로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어두운 곳과 쫓겨남과 그리고 이를 갊이라는 뜻부터 고찰해야 됩니다.
바깥 = '에쵸테로스'는 '더 먼데, 가장 먼곳'이라 하였습니다(마8:12, 22:13, 25:30). 낙원은 하늘나라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깥은 어디여야 됩니까? 하늘나라 바깥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바깥을 낙원(파라데소스)으로 표기하지 아니하고, 낙원에서도 가장 먼 곳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곳을 연단장(베마)이라 했습니다.(롬14:10, 고후5:10)
어두운데= 로 표기된 '죠포스'는 '어두움, 흑암'이라 합니다(마8:12, 22:12, 25:30, 벧후2:4). 낙원은 어둡지 않고 밝은 곳입니다. 그러나 바깥은 빛이라고는 전혀없는 어둡고 캄캄한 흑암(스코토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두운데는 교정받는 교육장소가 아니라, 연단받는 연단장(베마)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슬피울다= 로 표기된 '크라우드모스'는 '울음, 애곡'을 말합니다. 하늘나라 낙원에서는 슬피우는 곳이 없습니다. 그곳은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따라서 슬피울어야 될 곳은 어디이어야 됩니까? 연단장이지 낙원은 아닙니다.
이를 갈다= 로 표기된 '브루그모스' 다음에 '호도우스'의 소유격 복수로서 '오돈톤'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브루그모스'는 '갈다'로 읽게되고, 치아이므로 '이를 악물다, 이를 갊'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를 갈아야될 곳은 어디이어야 됩니까? 그곳은 낙원에서 받는 교정이 아니라, 연단장에서 연단의 고통을 말합니다.
출처:찬양의교회 http://thechurchofpraise.net/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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