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회개: 엘리야의 영

열리야의 영과 능력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면의 낙타털옷을 입고자 해야 한다. 계속 입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영은 회개의 영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변화이다. 변화는 기쁨이다. 선지자의 성품은 절대 고정되어 있거나 정체되고 고집이 세서는 안 된다. 그는 안으로 뒤집은 털옷을 입고 있다.

예레미야 18장에서 토기장이의 물레 위에 놓인 그릇처럼 상항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은  것이 엘리야의 영이다. 우리의 성품과 인격을 포함하는 혼(soul)은 곧 우리 영(spirit)의 옷이다. 이는 무화과 나뭇잎의 의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진정한 마음가짐을 하나님이 보시지 못하게 감추려는 간사함이 가득한 인격을 형성했다(하나님은 벌써 다 알고 계신데도 말이다). 그래서 시편 32편에서는 마음에 간사가 없고”(2)라고 표현한다.

요한의 내면의 옷은 양심을 일깨우고 모든 거짓을 들춰내면서 지속적으로 찔러 대고 있다. 우리는 교만과 자화자천의 벽을 쌓는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므로”(64: 6) 그것을 쳐부수신다. 다음 구절을 살피고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1-12). 요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왜 그가 구약에서는 제일 큰 자이지만 새 언약 아래서는 제일 작은 자인가? 

주님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등장하면서 천국에 접근하는 방법에 변화가 있었다. 예수님은 역사의 한 짧은 기간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요한이 얼마동안 말씀을 선포했는가? 아마 10년도 안됐을 것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요한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혁신적인 새 방법을 소개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요한의 때까지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하였다라고 표현하셨을 때는, 바로 이 변화를 주시하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사역에는 예언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그러므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어떻게? 침노는 뭐한 말인가? 무엇이 바뀌었는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인류는 천국에 합당할 정도로 선행을 행함으로써 천국의 방법으로 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구약에서는 모든 선지자가 회개를 선포했지만, 요한의 때까지는 회개 그 자체가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 되지는 않았다. 회개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 데 대한 해독제였다. 의의 길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의에 사는 것, 하나님의 규례에 복종하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선포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회개는 그 길로 되돌아오라고 부를 따름이었다.

요한에게서, 회개는 완전히 혁신적인 것이 되었다. 그에게서는 도끼가 나무의 뿌리에 놓여져야만 했다. 사람들은 과거와 같이 이미 닦여있는 그 길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회개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요한에게로 왔다. 요한은 그런 생각을 거부하고, 회개의 새 방법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요구했다. 요한은 어떤 형태로든 의(righteousness )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의 역량에 절망해왔다. 그는 사람들이 선행을 함으로써 의로움을 단지 겉으로 보이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self)의 완전한 죽음을 주장했다. 그는 그래, 선행을 행하라.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도끼가 뿌리를 찍어야 한다. 요한의 방법은 죽음의 길이었다. 사람에게는 회개함으로 회복될 수 있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전 체제가 다 무너져야 하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어야 한다.

이 해석이 바울신학의 핵심메시지가 되었다. 요한의 메시지가 입증된 것이다. 인간은 철저하게 죄성이 있다. 남겨 둘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해답은 죽음과 재탄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는가? 왜 요한의 방법을 폭력적 침노라고 말하는가? 요지는 누가 이 일을 하고 있어나?”이다. 요한이 그랬고, 은혜를 선물로 받는 대신에 요한의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예전의 방법은 사람이 행하는 의로운 행위로 천국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환경을 바꿈으로써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사회 운동처럼 외형의 일이다.

요한은 사람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선행을 하던지 간에 그것 자체만 가지고는 정말로 바뀌어야 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의 내면의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요한의 방법은 십자가와 부화 이전에 있었다. 그의 방법마저도 선행으로 천국을 얻어내려는 과거의 방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까지 계시되지 않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구원을 알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악한 것을 무너뜨리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얻어내려 했다. 그러므로 나라(그의 방법을 따르려 하는 모든 사람)가 침노를 당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1 12절의 번역 중 하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나라가 폭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The kingdom of heaven is coming violently).” 이는 물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거나 폭력적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우리 자신(own self)에 대한 죽음의 폭력이라고 이해하고, 이 책에서도 그 이해를 받아들인다.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나라에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요한의 방법은 높은 산을 낮추고 낮은 골짜기를 높이면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변하지 않으며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의 내면의 요새가-즉 경직된 생각, 당연시 여기는 편견과 차별, 살펴볼 겨를이 없는 자동적 반응, 보이지 않는 잘못된 동기, 영의 숨겨진 죄, 선행을 행하는 자의 뒤에서 의심받지 않은 상태로 작동하는 기묘하고 복잡한 것들-성령의 검의 수술대에 놓이지 않으면 십자가 사람의 핵심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다.

엘리야의 임무는 언제나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가 있기 전에 이루어진다. 설교자가 먼저 죄를 들추어내고 그 담음에 복음의 향료을 바르는 이중메시지를 쏟아낼 때, 그는 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 요한이 인간의 생각(mine)의 모든 기중을 갈아 뭉개버리는 이 혁신적인 회개를 부르짖었을 때,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얻는 새로운 방법이 제시된 것이다. 이는 더 이상 내면의 인격구조에 선을 쌓아가는 긍정적인 방법이 아니라, 거짓된 것을 파괴하는 폭력적 방법이었다. 도끼는 원래 폭력적인 것이다. 잘라버린다. 토막을 내고, 내리친다. 도끼날 위에서 쉴 수는 없다.

일단 요한의 정신적 도끼가 내려치기 시작하면,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고, 그 자체에 멈출 수 없는 생명이 생긴다. 에드거 알렌 포우(Edgar Allan Poe)가 쓴 [구덩이와 진자(Pendulum)]의 공포처럼 된다. 내가 설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의 조각이 무엇이든지간에 진리의 도끼는 숨겨진 동기를 발견하고, 당신은 절망의 구덩이로 다시 한 번 미끄러진다. 피할 길이 없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죄가 철저하게 침투하였기에 도끼의 내려침은 한번 시작하면 결국 그 뿌리를 잘라내고야 만다. 우울과 자기의 죽음이 우리를 기다린다.

예수님의 안에서의 신뢰와 은혜를 확신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과 상담을 해보면, 그 우울증 뒤에는 필연코 요한의 도끼가 있다. 도끼는 그 희생자의 내면에서 휘두르는 반경을 계속 확장하면서 종은 감정의 모든 토대를 우울증이 자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십자가의 자비가 있기 전에,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군중에게 이 도끼가 휘둘러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교만과 자기-확신이 분쇄되었을 때야말로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 요한의 일을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길을 준비할 따름이다.    <엘리야의 임무/&폴라 샌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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