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창조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너무도 광대하십니다. 비록 그 엄청난 사랑의 최고의 계시가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질서의 전달자들을 통해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만일 자연의 질서가 우리의 마음을 창조주에게로 가까이 이끈다면, 그 자연의 질서는 초자연으로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연의 질서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숨겨진 창조주의 변함없는 사랑의 선포와 메시지를 함께 들려줍니다(1:20).

다윗은 창조물의 전달자들을 통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추구를 선포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이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9:1-6)

하나님께서 일상의 단조로움에 묻혀 사는 어린 목동이었던 다윗의 굶주린 마음에 신랑과 같이 빛나는 계시를 주셨을 때, 그의 마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윗은 창조주의 사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매일 쉽 없이 떠오르는 태양은 그의 소유된 백성을 향한 지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그 백성을 기뻐하십니다(62:5)! 이런 통찰력이 다윗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을 때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감동이 일었을까요? 단지 몰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우리는 창조의 질서를 통해 우리를 추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현재 마주치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그분의 발자취에 고정하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그분의 신성한 그분의 발자취에 고정하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그분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은 단지 기계적인 일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자들은 자연과 피조물의 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물 속에 숨겨진 사랑의 하나님의 표징들을 깨달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보는 눈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헌신과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자에게,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주는 극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손으로 심겨진 나무와 숲이여!
, 푸른 초원과 반짝이는 꽃들이여!
내게 말해다오.
그분이 네 곁을 지나갔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인 증인, 쉼 없이 발하는 음성, 그의 깊은 사랑의 메시지와 그분의 뛰어난 온유함 가운데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피조물의 질서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타오르는 사랑의 동기와 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랑을 인식하기 위한 마음의 눈을 갖기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없이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담겨 있는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듣는 귀와 보는 눈이여!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중에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연약함, 즉 기울고 절뚝거리는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마음이 갈망하고, 찾고, 쫓던 분을 찾음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 곳에는 대부분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분이 누구인가 생각할 때 이것이 충격이 되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은 어떤 사람보다 더 낮게 엎드리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온유하고, 모든 사람 중 가장 겸손하고, 또한 가장 낮은 자이십니다. 그분이 가장 추구하시는 것은 연약하고 깨어진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 평범하고, 단순하고, 심지어 가장 약하고 깨어진 상황은 건너뛰고 모든 높은 곳에서만 그분을 찾습니까!

그 분은 부유한 자로서 가난해지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멸시하지 않으신 그분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낮은 자리를 자신을 던지셨고, 어떠한 위엄이라는 관점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내려가셔서 낮아지고 또한 여전히 낮은 곳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과 희생으로 낮아지고, 온유함의 길을 선택하고, 순복의 자리를 품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그 놀라움은, 바로 자기 비움의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신 우리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워 그들 아래에서 섬기면 그러한 우리의 아래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분은 언제나 아래에 계시면, 언제나 온유하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자신을 비우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높이고 힘을 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계속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예물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 그분의 사랑을 부으시고, 모든 기회를 따라 우리의 사랑에 힘을 북돋기를 갈망하시며, 그분과의 새로운 교제로 위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 낮고 기대하기 어려운 곳은 종종 가장 달콤하고 가장 위대한 교제를 만들어 냅니다.

최고의 사랑, 위대한 기쁨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일 가운데 울리고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십니다. 주님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듯 사랑하고, 그분이 영원히 사랑하듯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사랑을 위해 전부를 주고, 아무것도 아끼지 말라고 부지런히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간청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2-14).” 이 말씀에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싶은 희생과 내려놓은, 바로 그 동일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위해 네 목숨의 전부를 내려놓으면 너희는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영원히 사랑한 방법이며, 이것이 내 친구인 너희가 너희의 우정을 보여주도록 초청하는 나의 방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드리는 사랑의 제사가 하나의 강의 되듯, 이 두 명령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로 모일 때, 기쁨이 충만하리라는(15:11)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모든 것을 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모든 말을 마치 하나님께 하듯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위엄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은 진리 안에 있는 그 존재를 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진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언제나 사랑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 우리의 주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명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함께 품고, 전부를 드린 사랑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전부의 사랑 안에서 이 명령들이 온전히 함께 이루어질 때,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실 것입니다(14:21, 23)

사랑의 초고의 경지는 순복하고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배우자, 가족, 친구, 심지어 원수를 위해 내려놓으신 분과의 가장 높은 경지의 교제를 하게 됩니다. 주님의 전부를 주신 것처럼 우리가 전부를 드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참된 사랑 안에 거하게 되어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15:11, 벧전1:8).

<‘전부’(Entirety)중에서…/다나 캔들러/드보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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