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듣기를 방해하는 산만함

주님의 선지자는 반드시 성령님이 아닌 다른 모든 도움을 끊어야만 한다. 심지어 친구관계조차 덫이 되고 그의 듣기를 현혹할 수가 있다. 친척들에 대한 충성이 듣기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애국심과 애향심이 걸림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국노라고 부르면서 가죽채찍과 말로 빈정거릴 때 예레미야가 어떻게 느껴야만 했을지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도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 같이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21:8-10)

엘리사는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돌아서지 못하도록 그의 소들과 멍에, 쟁기를 불살랐다. 예수님은 훨씬 깊은 단절로 부르신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9:59-60).

이 젊은 남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무르며 아비를 장사지내는 자식의 의무를 다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런 다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유롭게 집을 떠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은 가족의 연줄을 끊으신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다 되지 못하고”(14:26)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단어만큼이나 많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사랑의 주님께서 제정신으로 우리에게 미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 이 문맥에서 미워하다는 자유를 베어버리고, 계속되는 육적인 영향력을 미워하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성격과 인격, 그리고 혼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 가계와 국적, 인종과 문화의 한복판에서 형성되었다. 이 모두는 죄로 병들었으나, 외관상 유익해 보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것은 옛 자궁에서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의 새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탯줄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모든 방식들, 동기들, 충성, 소유물, 질투, 두려움, 육적인 사랑-이 모든 내면의 충동들-이 거의 점검받지 않은 채로, 선한 것처럼 가려져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하여서도 죽는다. 우리는 우리이며 우리였던 모든 것에 대해 죽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과거-모든 친적들, 선생들, 인종 그리고 문화-를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사랑의 관계에 여전히 계시고, 아내와 자녀들과 남편의 사랑에도 여전히 계신다.

이제 쟁점은 사랑하기를 누가 할 것이냐 그리고 어떤 성품을 통해서 할 것이냐이다. 주께서 그분의 성품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옛 방식 속에 우리의 죽지 않은 자기가 계속 존재할 것인가?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