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함정을 조심하라

우리가 듣는 것에 대해 동료신자들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따르는 함정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함정은 육체이다.
우리 각자는 자연적으로 특별해지기를, 다른 형제, 자매들과 구별되기를, 유일하고, 진귀하고, 우위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계시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다른 동료 신자들보다 낫다고 말하는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사실 모두 그들의 생각일 뿐인데 말이다. 거의 모든 교파가 한 두번은 그들 자신들의 계시만이 바른 것이고 그들의 교인들만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교만은 우리 모두를 속이고 만다(3).

두 번째 위험은 물론 사단이다.
사단이 실족한 것은 교만으로 인함이었다(28:14-17). 사단은 누구든지 같은 길로 내려갈 자를 이끈다. 사단은 그의 쓰러져가는 장막에 가장 큰 위험이 될 만한 이를 찾아와 병들게 한다. 사단과의 전쟁에 누구도 홀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 전쟁을 맡을 자는 더 이상 돈키호테 식 성도가 아니다. 이제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할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로 짜진 몸이다(2:7-8)

사단의 일은 난도질하고 분리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를 다른 이들보다 높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로 겸손하고 서로 의존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두머리로 가장 낮은 자가 되게 하시고 성인을 가장 죄인으로 만드신다(딤전1:15)

사단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 접근한 것처럼, 듣기가 최절정일 때 기도의 날개 위에 찾아온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성령으로 일단 가장 충만하게 될 수만 있다면, 기도할 대 가장 황홀한 기쁨을 누린다면, 그분의 말씀을 가장 확실히 안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사단의 맹습에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되지가 않는다. 예수님께서 침례 이후에 이때보다 더 성령으로 충만할 때가 있었는가? 그 정점일 때 사단이 다가왔다. 사단은 성공하지 못하고서 얼마동안떠났다(4:13)

그리고 사단은 언제 다시 왔는가? 예수님께서 힘이 빠지고, 낙심하고, 상하고, 깨어졌을 때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거의 변모하실 때쯤이었다. 이때 사단은 사랑하는 한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 왔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사단은 그 다음 언제 왔는가? 성찬식이 막 시작될 때에, 예수님과 사도들의 생애에서 연합과 예배가 최고조일 때이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22:3).

사단은, 우리가 이미 내려갔을 때가 아니라 영광의 절정이 기회를 마련해줄 때에 온다.
러므로 듣기(하나님의음성)는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다. 수많은 상담가들의 도움을 받을 때 안
전하다. 영성이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다.오히려 드러냄이 안전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
제자매들과 한 데 짜여져 있는 것이 안전하다. 체험은 크고 귀중하지만, 강한 자가 교만에 결박
당했을 때에는 빼앗길 보물일 뿐이다(3:27).

성경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사단도 성경말씀을 잘도 인용한다. 오직 몸안에서 자신을 낮춤(humility)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일단 보호 장치가 있다면, 이 모든 것들-영성, 성경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음성)듣기에서의 영적 성장은 약함에서 강함으로, 실수에서 실패치 않음으로, 위험에 노출됨에서 안전함으로, 불확실함으로, 혹은 의존에서 독립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음성)듣기에서의 영적 성장은 그가 다른 형제자매들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에 이뤄진다. 만약 그가 그 자신의 힘을 확신한다면, 그는 약하고 쉽사리 속임을 당한다. 그의 지식이 틀림없이 보장해준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실족한 것이다. 만약 그가 홀로 어둠의 힘과 맞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 싸움은 필요가 없다. 적들은 이미 그를 차지했다. 만약 그가 독립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의 찬양은 속이 텅 빈 것인데, 그는 그에게 그의 필요를 보여주실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직접 듣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 축복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의 형제자매들의 지혜에 훨씬 더 의존할 정도로 그를 겸손케 할 것이다. 모세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고 그의 형제들과 다르다고 여기소서 그들의 연약함을 경멸하지 시작하지 않았던들, 그가 온유함으로 바위를 향해 말하지 않고 그 바위를 쳤겠는가?

모세와 아론이 총회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라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20:10-11).

어떻게 모세는 그 형제들이 죄를 법했을 때에 민수기 12장과 16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엎드리지 아니하고 그들과 분리될 수가 있었을까? 그는 직접 듣기의 절정에 도달해있었다.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이 났다. 혹시 그가 교만해졌던 것일까?

경고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건지실 것이고, 우리에게 영예를 주실 것이다(91:15).우리는 그 높은 곳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가 넘어지면 그보다 더 많이 우리를 바로 세워주실 것이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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