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엘리야의 임무 – 그리고 수눔 보눔(Summum Bunum:최고선, 인간이 궁극적을 추구하는 바를 뜻하는 라틴어-역주)

하나님의 검이 인간들의 마음을 더 깊이 찌르면 찌를수록, 귀신이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인하여 몸서림과 경련도 더욱 더 많아질 것이다.

마귀는 그의 황홀케 하는 영으로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사람의 영과 혼 속에 숨어 남아있기를 바랐다. 주님은 힘(두나미스)으로 사람의 정신과 영에서부터 마귀를 들추어내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는 않앙ㅆ다. 오히려, 주님은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그분의 엑소시아를 달성하셨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 속으로 성령님을 보내셨다. 그 이래 겨루기는 이미 승리했지만 계속되고 있다. 성령님께서 인류와 세상에서 귀신을 내쫓을수록, 사단은 더욱 더 표면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이는 다가오는 어둠의 증대가 사단의 능력이 아닌 그의 패배로 인함임을 뜻한다. 내가 개심(改心)하기 전에, 마귀는 신비사술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통해서 내 안에 서식하고 있었다.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나는 육적인 결심으로 의로운 척 연기하며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축할 수 있었다. 사단은 그 겉치레를 훼방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서 확실한 은신처를 가졌다.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나는 내가 그래왔던 것만큼 괜찮은사람일 수가 없었다. 성령님은 원수를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하고 계셨다. 이는 완전한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에 관한 모든 악의 증대는 인간들의 깊은 생각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서 그 속에 길제로 있어온 것들을 표면으로 가져오시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단은 인류가 계속 착한 채 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단을 계속 숨어서 인류를 조종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한동기로 합리화시키지만 사실은 그들을 증오와 적개심에 빠지게 하는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메마름과 고층들을 보내는 이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4장을 보라).

진짜 내가 표면에 드러나 내가 그것을 직시해야만 했을 때에, 그것은 굴욕적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일부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표면화되는 것이 사악한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죄를 감추는 것은 사단의 일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다. 승리는 이미 주어졌다. 사단의 기만은 온 인류의 생각과 마음을 벌집처럼 쑤셔놓고는 그 위를 흰색 도료로 회칠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악한 줄을 아신단(15:19). 그분은 줄곧 알고 계셨다. 그분은 오직 우리가 이를 보기를, 이를 인정하기를, 그리고 온전하게 되기만을 바라신다. 이 때문에 고난이 온다(16). 화가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온전케 되려면 화를 보내셔야만 한다.

따라서 엘리야의 임무는 직접 악을 노출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이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해서 회개되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도끼는 여전히 뿌리를 베고 있다. 진리의 검은 아직도 혼과 영을 쪼갠다. 하나님의 정신 의학(psychiatry)은 작동하고 있다. 그분의 선지자들은 반드시 듣고 순종해야 하는데, 빛은 어둠이 숨긴 것을 적발하기 때문이다. 감춰졌던 것은 뜯기고 발버둥 치다 죽는다. 그리고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종이 굴욕을 당하고 겉으로 보기에 사람 앞에서 경히 여겨지는 것은 다 괜찮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신에게 영예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산을 기어오르고, 가장 긴 홈런을 날리며, 정치적으로 승리한 자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설교가들에게서 듣기 위해 몰려다니며,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아낌없이 찬양하며, 거대한 성전(聖戰)을 치르려 떼 지어 떠날 것이다-겸손한 복종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시는 주님을 놓칠 뿐이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종을 공경하든 칭송하든, 이는 그 종들에게 굴욕이 되며 이로써 그 다음에는 그 종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새기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들 안에서 충분히 깊어지면, 그들은 세상을 한 번 더 뒤집어엎을 것이다.

기적에 의해서든 굴욕이나 고통에 의해서든, 기도를 통한 승리로 인함이든 실행에서의 깨어짐으로 인함이든, 엘리야의 임무는 하나의 준비(preparation)이다. 우리 모두는 하얀 작물을 거두길 원하지만, 그전에 우리들 대부분은 퇴비를 거둘 것이다(4:35; 13:8). 순종은 준비의 표어(슬로건)이다. 히브리서 58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듯, 예수님께서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것처럼, 교회는 굴욕 당함으로 참된 마음의 순종을 배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나 교회가 어림짐작으로 그 일을 성공시키려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성령님께서는 악을 표면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개시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이 세상 앞에서 낭패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패배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실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패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6장에서 나오듯) 그 선지자를 돌로 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서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보내셔서 그 나머지 사람들의 어둠을 드러낼 빛을 비추게 하셨다(고전11:19). 그분은 회개로 이끌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흔히 우리가 우리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노출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messenger)들을 욕할 때이다. 하나님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증인들도 결코 어둠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1:5, RSV 역자해석)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세상은 평화와 조화, 그리고 꿈, 그 자체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는 꿈의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주님은 인생의 시련을 사용해 크리스천들의 혼을 완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이 잔존한다 해도 낙담하지 않는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45:7)

선지자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긴다(8:28). 세상은 모든 것이 전부 똑바르게 되어야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에 안계시거나 돌보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지자는 지구(세상)를 회복시키려는 꿈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는 전혀 회복시키지 않으실 주님에게 충성한다-물론 종국에는 모든 것을 회복시키 주실 테지만 말이다. 선지자는 엉망진창의 한복판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신뢰하면서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괴로움은 참된 것이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세상에 남아있다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을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8-19)

하나님은 진짜 보석이 드러나 윤이 나게 하시려고 흠 있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러는 사 이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그러므로 수눔 보눔(최고선)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아버지(Father)의 증거가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 앉으신 지혜이시다. 그분은 인간들 사이에 하나님의 표현이고 입증이 되신다. 그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더욱 더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아직 그분처럼 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사를 통해서든 재앙을 통해서든 죄를 드러내는 일이고, 이것이 곧 엘리야의 임무이다. 이것이 없이는 영광에 이르는 부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우리 가운데서 말라기 3장을 이행하기 위하여 금은 연단하는 자의 불로 온다. 교회가 이 엘리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어나기를!

그러는 사이, 강에는 댐이 세워지고 아이들은 차에 치이지 않게 보호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환상과 꿈, 모호하고 직접적인 말씀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불러 각자 그들의 부분에서 역할하게 할 것이다. 대단원의 막이 내기기 전에, 크고 작은 부분들이 그들의 활약과 활동들로 채워질 것이다. 각 장면마다 세부적이고 사소한 일들이 더해지다가 드라마 속의 악인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교회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위해 요단을 건너고 있다. 오늘날 백성들 앞에서 법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은 주님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지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모사들과 치유자들, 복음전하는 자들과 교사들을 받아들여 왔다. 축사 사역자들까지도어느 정도 인정을 얻고 있다 그러나 선니자들과 사도들은 맨 마지막인데, 이들이 매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단은 요단의 물들을 밀어올리기 위해 앞서 간다. 사도행전 13 2절에서처럼, 하나님은 따로 세워질 자들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주님이 부르신다. 그러나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엘리야의 임무/&폴라 샌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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