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나? 밖에서 우리 귀에다 대고 속삭이시나? 천사를 보내시나?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나?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방법으로 말씀하고자 하실지라도 그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지문들에 우리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로 겸손하게 하고 뭐든지 딱 맞는 상자에 넣어두려하는 우리의 성향을 무너트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한 목소리를 발하실 수도 있고, 하늘의 전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임을 확신하기를 항상 바라고, 그 듣기를 통하여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추구하실 바란다.

때로 우리는 보다 확실하길 바라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들리는 음성으로만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일지라도 흔히 듣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마태복음 3 17절은 하늘에서부터 한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 11절과 누가복음 3 22절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한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동일한 단어들도 다르게 듣도록 하시는데, 보통은 그분의 목적과 듣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진실은 그 차이점들로 인하여 경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진다. 사울이 주님을 보고 들었을 때, 그 곁에 있던 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9:7).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울의 태도는 그와 함께 있는 자들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달랐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시고…” 라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낸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12;28-29).

때때로 우리는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크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보다 흔히는 그들에게) 정확하게 말씀해주신다면!”하고 바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그분이 또박또박 말씀하셨을지라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우레가 울었다하고, 또 다른 이들은 천사가 말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생각지 못했다.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개인적으로 듣고 지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그룹에게 환상을 주시거나, 크게 말씀하시거나, 설교자나 선지자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실 수 있는데, 그러면 각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다르게 들을 것이다.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있어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그들만이 그 진실을 가졌다는 생각을 드러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듣기(지각하기,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간직하기)는 언제나 주관적이다. 내가 아무리 어떤 특정 사건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인식하더라도, 그래서 사방을 완전히 패쇄하고 있더라고, 그 일이 내게 신속하게 벌어질 수 있다. (우리)의 지각은 항상 낸 형제들의 교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1:14; 20:18; 24:6).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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