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하나님의 뜻의 세 가지 수준

하나님의 세 가지 구별되어지는 뜻이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히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 온전하신 뜻
첫 번째 아직 이세상 가운데는 오지 않았지만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같이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21;2)처럼, 천국은 언젠가는 이 땅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길 간구하는 이러한 기도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간청함으로 올려졌는데, 언젠가는 응답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개인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에 대한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그가 하나님의 손과 손목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가락처럼 움직이곤 한다. 그러나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혼자서만 독두를 할 수 있는가? 아리아로만 오페라를 장식할 수 있는가? 우리의 형제들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어떠한 한 개인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다른 모든 형제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우리는 그 완전한 뜻 안에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이 말씀은 우리가 온전하여 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까지 우리는 타락한 채로 남겨져 있고 우리는 이를 잊어버린 채 위험한 상태로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우리의 탕자적인 성향을 포용하시며 그분의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걷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휠씬 크고 힘센 나라들을 차지하시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문들을 열어 주시며,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질서와 열매를 가져다주시는 이 작은 우연의 일치들로 계속적인 기쁨을 누린다.

우리는 어떤 차를 미처 보지 못해서 우리가 멈추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주었을 상황에서, 우리의 발이 브레이크 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느 날 아침에 잠깐 떠올렸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 단편적인 생각들이 마음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말로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마음을 기쁨과 슬픔에 반응하며 우리를 성령 안에서 걷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에 말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계속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고 기도했던 것에 기적과 이사가 일어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찾고 우리를 통해 평안을 얻는다. 주님 그분 자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 기뻐하신 뜻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관대하신 뜻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우리는 아들들로 인정받았고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 여왕의 잔치에 함께 했던 자인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약간 부족하긴 하지만, 그것을 아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훈련 가운데 있으면서, 있어야 하고, 소심해지며, 치유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기도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무지에서 깨어나 훈련받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잘못된 말을 했을 때 갑자기 몸이 화끈거리거나 창피함에 사로잡히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실 때가 있다. 혹은 친구나 관계를 통해 꾸짖기도 하신다. 차가 시동이 안 걸리거나 진흙 가운데로 던져지는 것 같이 수백 가지의 방법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버지는 우리의 실수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죄를 가르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때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계심으로 우리를 꾸짖으신다. 다른 예로, 오늘날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는 비인격적이고 매정하지만 효과적인 법에 걸려드는 것에 반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의 가책으로 활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바람 가운데 씨를 뿌리고 회오리 바람 가운데 거둔다.

선하신 뜻
우리를 아버지의 세 번째 수준으로 데려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율법이다. 이것은 좋고, 아주 좋은 것이지만, 부동적이다. 시편119편은 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7:12)라고 말하고 있다.

그 율법은 십계명도 아니며 모세 오경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초로 했다. 이것은 아주 잘 만들어지고 훈련된 전 우주의 기본이요 질서이다. 혼돈 또한 이 합리적인 기본원리 속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원리들이 마구 섞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이 기본 원리 밖에 있는 것은 없다. 인류 가운데 모든 도덕적인 율법으로 주어진 십계명은 우리의 이해범주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 율법은 우리에게는 비인격적이지만, 그분께는 결코 비인격적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사랑하시며 인격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해로 그 사랑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작동을 비인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이다.

그 율법은 가차 없다. 아무것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도 그분의 법칙들을 지키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우리에게 기적과 신비로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알고 있는 원리들을 초월하는 원리들의 작동으로 된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균형과 응보의 원리로 지으시고 역사하셨다. “모든 작용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모든 화학과 기술도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를 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의 율법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건축가들은 초고층건물들을 짓지 못하며 우주인들이 지구 밖을 여행할 수 없고 전기공은 집에 전선을 설치할 수 없다.

우리는 어찌하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사업에 대한 불법적 행위나 공학 기술을 무시하는 것보다도 더 쉽게,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며 다른 남녀들과 잠자리를 한다. 그들은 죄를 범하고 일주일이 지나도 잡히지 않는 범법자들처럼, 마치 그들이 율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법무 집행보다도 완벽하다.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의 믿음은 계시 안에 있다.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선지자들은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데, 우리의 중보의 힘과 용서의 권세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은 모두 그 안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강조하는데 선지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상의 탑의 확실한 대들보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를 토대로 지으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스스로를 높을 때, 그는 선지자의 자격에 대해 다루심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뜰 안에도 들어갈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1:33). 물리적인 법으로 그들의 삶에 위로와 보호함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영적으로 시도하려면 자유롭게’(법 없이] 되어야만 한다고 행각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든 생각들을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고후10:5).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다른 누군가를 동의하게 만들 자격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사용하신다. 각자 의견을 고수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만족에 따라 자유롭게 실험하기를 주장한다면 인과응보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그의 형제로부터 물건을 훔쳤을지라도 하나님과 그 형제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삶이 정상적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던진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부분에 긍휼을 품으시고 회개와 용서를 위해 경고하기 원하실 때를 제외하고, 인간에 대해 느끼시는 하나님의 방법에서도 변함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명하실 때 용서와 치유를 원하시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불변의 율법에 따라 징벌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법률이기에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내가 이 일을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응보가 아니라 우리가 뿌린 것에 대한 수확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빵 조각을 물에 던지면 축복의 빵 덩어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번영에 대한 원칙에 준하여 그분의 전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첫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였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하지 전보다 확대되어서 돌아오게 된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어떤 이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잘못된 동기로 뭔가를 한다면, 그 법의 작용에서 다소 제외된다고 생각하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한다면 잠지리를 같이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죄는 죄다. 법은 법이다. 우리는 어떠한 느낌과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을 보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씨 뿌린 것에 대해 계속 은혜의 추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바퀴, 타이어, 전깃불, 건전지, 발화, 안전장치 등의 발견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 , 전기기구, 의복, 텔레비전과 라디오, 수술과 의술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오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퀴리부인이 한 발견으로 전 인류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율법은 비인격적이자 일반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씨를 그들이 거둔다. 우리는 서로가 개인적으로 뿌린 씨앗들로 인해 서로 좋은 것들을 수확하고 있다. 이는 축복된 삶을 나누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원리로,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이 전화를 하고 텔레비전을 본다. 모두들 뿌리고 거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5:45).

열 살짜리 소년이 공평함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아들 테미에게 너는 내가 침실로 가거 자라고 할 때에 가서 자야 해. 쟈니가 어떻게 하느냐는 신경 쓰지 말거라. 나는 아빠란다. 너는 아빠자 한 말대로 해야 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에 이런 식으로 답하시곤 한다. 사실 공평에 대한 우리의 간청함이 우리의 탐욕을 가리우는 망토처럼 사용될 때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의중을 담아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5)라고 물으셨다.

선지자는 그가 어떤 이상한 것들을 보든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꼭 기억해야 한다. 만약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5)

믿음은 이해를 앞서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이해를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은 축복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단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율법이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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