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 10:9).”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그 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마음의 보좌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릴 수 있는가?
당신의 안방을 그 분에게 내어드리고 당신은 건너방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손님처럼
섬기던 그 분을 주인처럼 섬길 수 있는가?
그 분이 요구하실 때 언제나 순종할 수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실 때도 따라가겠는가?
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세상의 쾌락들을 즐기면서 살아왔지만 그 분은 더 이상 그런 생활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면 당신은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일부만 드려도 되었지만 그 분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면 당신의 전부를 그 분에게 드려야 한다. 그럴 수 있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메시아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기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 나는 앉아 있고 예수님께서는 서 계셨다. 내가
예수님보다 훨씬 컸고 내가 예수님보다 항상 앞섰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께서 점점 커지게 된다. 예수님께서 먼저이고 내가 나중이 된다.
나는 낮아지고 예수님은 높아지게 된다. 나는 서있고 예수님께서 앉아 계시게 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려면 자아를 죽여야 한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사막에서 차가 모래에 빠졌을 때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으면 앞으로 나갈 것 같지만 차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바퀴가 더 깊이 빠져 들어갈 뿐이다. 뒤에서 밀어볼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방법은 하나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바퀴에서 바람을 빼는 것이다. 바퀴에서 바람을 빼면 차가 내려앉게 되고 그렇게 한 다음 밀면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우리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을 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더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렇지만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방법은 하나. 우리의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바람을 빼는 것이다.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자아에서 교만의 바람을 빼내고 우리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가두어두었던 인생의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어느 노인 부부가 교회에 새로 나와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부부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 부부가 교회 모임에 참석해 보니 모두 등에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노인 부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떤 건물에 쓰여 있는 글을 그대로 본 떠와서 옷에다 새겼다. 그리고 다음번 모임에 그 옷을 입고 나갔다. 보는 사람마다 노인 부부를 보고 웃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Under New Management.’
아파트 단지 같은 곳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문구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문구는 노인 부부에게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인이 새롭게 바뀌었다. 그들은 평생 자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뒤늦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글자 그대로 ‘Under New Management’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 때 천국 시민권이 주어지고 천국 열쇠도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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